1월의 남해 금산 여행기
남해 금산은 보리암과 산장으로 유명하다. 보리암은 한국의 3대 해수관음성지다.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관음상이 인상적인 절이다. 보리암은 기도를 잘 들어주기로 유명한 곳인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이곳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산장은 보리암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보리암을 벗어나 제석봉을 향해 가다보면 갑자기 오래된 산장 건물이 눈 앞에 나타난다. 옛날에는 보리암 비구니들의 숙소로 썼다고 한다. 지금은 할머니 한 분과 아드님 한 분이 산장을 운영한다. 산장에서는 잠을 잘 수도 있고 밥을 먹을 수도 있다. 남해 금산의 일몰과 일출을 보고 싶다면 산장에서 하룻밤 묵는 것도 좋다.
1월 20일 새벽 버스를 타고 남해로 내려갔다. 원래는 굴업도 백패킹을 계획했지만 기상 악화로 포기해야 했다. 대안으로 고른 곳이 남해 금산산장. 지난해 여름 한 번 가본 곳이었다. 산장 주인분이 겨울에 오면 일출과 일몰을 더 깨끗하게 볼 수 있다고 한 것이 기억났다. 함께 남해로 내려간 친구는 게임회사를 다니는 한 살 터울의 형이다. 전 직장 동기로 만나 술친구, 여행친구로 함께 하고 있다. 남해터미널에 내려 점심식사를 해결했다. 남해 전통시장의 맛집이라는 봉정식당에서 멸치쌈밥을 먹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소주 세 병을 마셨다. 멸치쌈밥보다도 함께 나온 반찬이 더 맛났다. 특히나 굴무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요리였다. 근처 마트에서 먹을 것을 조금 사고 보리암으로 향했다. 보리암에 가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등산로를 이용하는 방법. 우리는 시간도 늦었고 날도 춥기에 차로 가기로 했다. 금산 밑자락에서 보리암까지 가는 셔틀버스가 있는데 제대로 운행을 하지 않는다. 지난번 방문 때는 버스 정원이 차기 전에는 출발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생한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해터미널에서 택시를 탔다. 그러나.
그러나 이번에도 고생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눈이 얼어붙어 차량 통행이 금지된 것이었다. 택시는 보리암으로 오르는 길에 접어든 지 몇 분 만에 멈춰 섰다. 우리는 배낭을 짊어지고 얼어붙은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22도의 업힐이 3km나 이어지는 난코스. 제설차량 운전기사가 우리를 보고는 혀를 차며 지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한 시간 반을 걸려서 마침내 보리암에 다다랐다. 해발고도는 600m가 조금 넘었나. 우리는 절을 앞에 두고 가져온 캔맥주를 마시며 자축했다. 차량이 통제된 탓인지 보리암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직원들은 모두 제설작업에 나선 듯했다. 우리는 사람이 없는 보리암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구름이 끼어 있었지만 날씨는 나쁘지 않았고 보리암에서 내려다보는 남해 바다는 절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밥과 술은 꿀맛이었다. 금산산장에 도착하자마자 정식을 주문했다. 시간은 오후 다섯 시 정도. 아직 해가 있었기에 우리는 바다를 보면서 밥을 먹기로 했다. 기온은 영하 5도 정도였다. 손이 덜덜 떨렸지만 술기운 덕분에 반찬 하나 남기지 않고 상을 깨끗하게 비웠다. 일몰을 지켜보고는 방에 들어갔다. 주인 할머니께 파전을 하나 부탁하고 방에서 남은 술을 마셨다. 저녁 아홉 시가 되기 전에 잠들었다.
별천지. 별천지였다. 새벽 두시쯤 잠에서 깨 밖으로 나갔다. 온 사방이 암흑천지였는데 하늘에 총총하게 박혀 있는 별들만은 반짝거렸다. 바다와 하늘은 경계가 사라졌다. 멀리 보이는 상주마을의 희미한 불빛들도 별처럼 보였다. 바람이 찼지만 한동안 산장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 봤다. 무엇을 하자고 별빛을 마다하고 가로등과 형광등이 빽빽하게 들어찬 도시의 삶을 지키려는 걸까. 찬 바람에 술이 깼다. 온돌이 뜨끈했다. 차가워진 몸이 금세 후끈해졌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산장 근처의 제석봉으로 향했다. 일출 예정시간은 7시 35분. 이미 수평선 근처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람보다 일찍 잠에서 깬 까마귀들이 산봉우리마다 가득했다. 바람이 매서웠지만 바위에 몸을 기대고 일출을 기다렸다. 올해 처음 보는 일출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맑았고 산정은 고요했다. 눈 때문에 오르는 길이 쉽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이런 정적을, 고요 속의 일출을 볼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바다에는 아직 긴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거뭇한 기운이 어려 있었고 하늘에는 수평선 근처를 중심으로 붉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일출 예정시간이 다가오자 수평선 한쪽이 유독 밝게 빛나더니 소복하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가만히 기다리자 봉긋하게 솟아난 붉은 기운은 점점 완연한 원형을 갖추기 시작했고 붉은 기운도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몸을 기대고 있는 제석봉 한편에 햇볕이 바짝 들었고 까마귀 한 마리가 그 사이를 날아올랐다. 해가 수평선 위로 완전히 떠오르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일출의 장관이 펼쳐진 곳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짐을 정리하고 산을 내려오니 오전 아홉 시였다. 전날 오후 네 시가 조금 안 되어 금산 밑자락에 도착했으니 열일곱 시간을 산에서 보낸 셈이다. 전날 밤 산장에서 마신 술 때문에 터미널로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다. 굽이굽이 해안길을 돌아가는 버스 밖의 풍경은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시를 읽었다. 함께 온 친구가 가방에서 꺼낸 이성복 시인의 시집 <남해 금산>. 우리는 술을 마시고 시를 읽고 해를 봤다. 전날 밤 술을 마시면서 함께 소리 내어 읽은 이성복 시인의 시가 입가에 계속 아른거렸다. 술 때문에 쓰린 속만큼이나 남해 금산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속에 나 혼자 잠기네
-남해 금산, 이성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