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걷다걷따

오름

2017 제주여행①

by 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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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일이 싱거워지면 나는 들녘으로 바다로 나간다. 고인이 된 김영갑 사진작가의 말이다. 제주를 사랑해서 제주에서 살다 죽은 사진작가의 책에서 이 문장을 발견했고 밑줄을 그었다. 산다는 일이 싱거워지면. 싱거운 삶은 어떤 삶일까. 그 말을 한참 입 안에서 곱씹었다.

침대에 누워도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밤새 잠을 설치는 날도 있었다. 자정 즈음에 침대에 누웠는데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결국 새벽 세 시 즈음에 불을 켜는 날도 있었다. 온갖 생각이 벼룩 떼처럼 달려든다는 말이 딱이었다. 생각이 많아졌고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소설을 써보려고 자리에 앉지만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새롭게 시작해보려는 일들은 잘 되지 않았다. 삶이 싱거워진 건가. 소금기 묻어 있는 제주의 바람이 그리웠다.


오래전부터 쟁여놨던 항공사 마일리지를 꺼내 썼다. 예전 직장에서 해외 출장을 다니며 꼬박꼬박 모아놓은 마일리지가 3만 점이나 됐다. 제주행 항공기를 예약하는데 1만 1000점을 썼다. 모처럼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겼다. 창 밖이 하얗게 밝아왔다. 이른 시간부터 출근길에 나선 직장인들 사이에 커다란 여행가방을 메고 섰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키오스크로 향했다. 키오스크에서 항공권을 뽑기는 처음이었다. 조금 긴장했지만 어려울 건 없었다.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항공권을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 안에 노트북은 없는지 물어보는 보안요원의 표정이 무료했다. 아흐레 만에 집 밖에 나온 대통령의 표정 같았다. 어색한 웃음. 공항 대합실에 앉아 LG TV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 비행기에 탔다. 3500원에 산 커피 맛은 밍밍했다. 이륙 전에 사무장이 직접 다가와 인사를 하고는 파란 잠바를 받아서 따로 보관해줬다. 비행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프레스티지석을 예약했는데 어색했다. 나는 그런 친절한 인사를 받을만한 사람이 아닌데.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계속해서 도망만 치고 있는데. 삶이 싱거워서 소금기 섞인 바람을 맞으려고 떠나는 건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사무장이 깨워준 덕분에 오렌지 주스를 한 잔 마실 수 있었다.


제주공항에 내리자마자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 타고 나서야 도청으로 향하는 걸 알았다. 시청에 내려서 옥돔 뭇국을 먹으려고 했는데 낭패였다. 되는대로 도청에 내려서 고기국수를 먹었다. 이른 점심이었는데도 손님이 많았다. 고기가 넉넉하게 들어 있어서 그런대로 배가 찼다. 다시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 갔다. 그곳에서 710-1번 버스를 갈아탔다. 버스는 요란하게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를 완전히 벗어났고 제주의 자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제주에 온 게 실감 났다. 제주의 얼굴은 어찌 됐든 자연 속에 있었다. 들판과 숲. 도로 옆에 늘어선 나무에는 바로 옆에서 자라는 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림자의 흔적들이 제주의 주름인 셈이다. 40분 남짓 갔을까.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리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버스는 날 뱉어내고는 미련 없이 가버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오름이 보였다. 용눈이오름과 다랑쉬오름. 갈림길에서 조금 고민하다 용눈이오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름은 선이 곱다. 밑에서 바라본 오름의 선은 사랑하는 여자의 젖가슴 같다. 손에 쥐면 행복할 것만 같다. 용눈이오름처럼 규모가 큰 오름은 특히나 선이 또렷하다. 오름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김영갑 사진작가가 오름의 능선에서 일몰을 기다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사진 속에 그 장면들이 담겨 있었다. 그는 제주 오름의 풍경을 이렇게 말했다.


"눈을 흐리게 하는 색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갈대밭 사이에 난 길을 천천히 걸었다. 말똥을 피해가며 언덕진 길을 오르다 보면 망망한 하늘이 점차 가까워진다. 그리고 바람. 바람이 나타났다. 바람은 제주의 특산물 중에 유일하게 손에 쥘 수도 육지로 가져갈 수도 없다. 그렇지만 바람만큼 제주를 잘 설명해주는 것도 없다. 그동안 제주의 바람을 충분히 겪었다고 여겼다. 그런데 용눈이오름의 바람은 달랐다. 그 날 나는 바람에서 죽음을 느꼈다. 이렇게 떠밀리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구나. 오름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겠구나. 가방 옆에 끼어놓은 캠핑매트가 바람에 날아가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여자의 젖가슴처럼 보였던 용눈이오름은 이제 수많은 바람의 전사가 싸우는 로마의 콜로세움 같았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바람에서는 전사의 죽음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느껴졌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두세 발자국씩 옆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바람에 떠밀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능선을 두 바퀴나 돌았다. 함께 올라왔던 관광객들은 어느새 사라졌다. 바람을 견뎌내며 갈대밭 사이에 난 탐방로를 다시 걸었다. 몇 마리의 말이 바람 속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갈기가 바람에 나부끼는데도 말의 눈망울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 옆을 작은 새들이 종종거리고 있었다. 이 바람은 나만 느끼는 걸까. 말과 새들은 바람을 신경 쓰지 않는 걸까. 이상한 풍경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파랬다.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였다. 능선을 내려오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잠잠해졌다.


성산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내가 올랐던 용눈이오름과 오르지 않은 다랑쉬오름을 봤다. 멀리서 바라보는 오름은 고요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가만히 멈춰 선 거대한 돌덩이들. 그러나 오름은 살아 있었다. 오름의 입구부터 언덕길을 따라 늘어선 무덤들을 생각했다. 오름이 작은 한라산이라면 오름에 있는 봉분은 다시 작은 오름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 무덤가의 풀을 말들이 뜯어먹고 있었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공존하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강이채의 <Radical Paradise> 앨범을 들었다. 그중에서도 LA를 반복해 들었다. 내게는 제주가 Radical Paradise인 셈이다. 성산에 도착해서 숙소로 가는 길에 작은 포구를 만났다. 사람 한 명 없는 포구를 하얀 개 한 마리가 지키고 있었다. 내가 앞에 서자 잠시 경계하더니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무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옆의 벤치에 앉아 책을 꺼내 읽었다. 패티 스미스의 <M 트레인>. 몇 개의 표현과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에르모사. HERMOSA. 얼마나 멋진지 몰라. 얼마나 쉬운지 몰라. 동물과 사랑에 빠지는 건. 어제의 시인들이 바로 오늘의 탐정들이다. 꿈은 삶에게 양보해야지. 천사를 위해서는 악마들을 참아낼 수도 있어요. 친구는 많이 아프고 앞으로도 많이 아프겠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거다.


바닷가의 숙소는 작고 아담했다. 게스트하우스의 더블룸을 혼자 썼다. 방 안에 욕실이 있어서 바로 샤워부터 했다. 창문을 열고 침대에 누웠다. 바다내음과 꽃내음이 잔뜩 섞여 들어왔다. 이거면 충분해. 이거면 충분하겠어.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감고 그렇게 되뇌웠다. 바다내음에는 소금기가 잔뜩 실려 있었고 꽃내음에는 비릿하고 촉촉한 흙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거면 충분하지. 더는 싱겁지 않았다. 손님이 거의 없는 근처 식당에서 해물뚝배기에 소주를 한 병 마셨다. 술기운이 오를수록 외로웠고 그래서 좋았다. 밤은 삽시간에 찾아왔다. 바람이 몰아치는 밤의 해변에 혼자 앉아 노래를 들었다.


해가 지고 뜨면 널 보러 가야지
천천히 구름 넘어 널 안아줄 거야
뜨겁게 빛나는 네 두 눈동자를
난 아무런 말 없이 바라봐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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