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걷다걷따

중산간 올레길

2017 제주여행②

by 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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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땅은 하나였다. 바다가 하나 듯이 땅도 하나였다. 2억 년 전쯤에 무슨 일인가가 생겼다.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바다도 하늘도 변함없이 하나였는데 땅은 갈라지고 나뉘기 시작했다. 어제까지 그림자를 맞대고 있던 나무들이 서로 다른 대륙으로 나뉘었다. 땅이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넷이 되면서 초대륙 판게아는 사라졌다.


독일의 지구물리학자였던 알프레드 베게너는 판게아의 존재를 믿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린란드로 떠났다. 자신의 50번째 생일이었던 1930년 11월 1일. 베게너는 동 틀 무렵 베이스캠프를 출발했다. 몇 마리의 개와 이누이트족 가이드가 전부였다. 그의 동료들은 혹한과 싸워 가면서 반년을 기다렸다. 베게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동상에 걸린 발가락을 잘라가면서 탐험대장을 기다리던 동료들은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제주의 한적한 중산간 마을길을 걷는데 자꾸만 알프레드 베게너가 탐험대의 베이스캠프를 떠나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전형적인 독일인의 얼굴. 두꺼운 털모자로 뒤덮인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의 배웅을 받고 있다. 그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서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몇 시간 뒤에 험악해질 하늘은 맑기만 하다. 베게너와 가이드와 개들이 한 점이 될 때까지 동료들은 가만히 서 있는다. 베게너의 마지막 모습이 생각나는 건 전날 읽은 패티 스미스의 책 때문이다. 그녀는 베게너를 기리는 대륙이동학회의 정회원이었다. 비트 제너레이션을 대표하는 뮤지션과 초대륙의 존재를 믿었던 독일의 지구물리학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는데 이렇게 적고 보니 묘하게 닮아 있다.


올레길 3코스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표선까지 바다를 따라 이어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중산간의 오름을 거쳤다가 표선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중산간을 거치는 길이 더 길고 험했지만 고민없이 걷기 시작했다. 올레길은 중산간의 작은 마을인 난산리의 골목으로 이어졌다. 어디를 봐도 귤밭이었다. 골목길이 꺾이는 곳에서 뒤를 돌아봐도 귤밭이었고 앞을 봐도 귤밭이었다.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아주 가끔 귤밭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만 했다. 길을 걷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그곳에서 길을 이끌어주는 건 올레길을 알려주는 끈이나 간세가 아니라 새소리였다. 인적 없는 마을길을 새소리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새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숲과 밭이 나타났다. 주인 없는 집을 지키는 개들이 내 존재를 알아채고 짖기도 했다.


오래지 않아 첫 번째 오름이 나타났다. 이름이 통오름이었다. 전날 오른 용눈이오름과는 규모부터가 달랐다. 용눈이오름이 입구에서부터 압도적인 전경을 보여줬다면 통오름은 고요했다. 사람도 차도 없었다. 어디에나 있는 작은 동네 뒷산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가파른 흙길을 천천히 올랐다. 갈대가 조금씩 나타나더니 어느 순간 작은 탐방로를 갈대밭이 에워쌓다. 갑자기 일변한 풍경에 깜짝 놀라 올라온 길을 돌아봤다. 뒤에는 중산간의 고요한 풍경이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작고 볼품없어 보이던 통오름이 그 순간만은 완벽한 전망대였다. 오름을 작은 한라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난해 한라산 영실코스를 올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힘든 길을 한참 오르고 구상나무 숲을 지나자 갑자기 광활한 평원이 나타났다. 앨리스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산정에 어떻게 이런 풍경이 숨어 있었을까. 한참 넋을 놓고 바라봤다. 통오름의 정상도 비슷했다. 한라산과 규모에서는 비교할 수가 없었지만 한 순간에 일변하는 풍경은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갈대밭 사이에 난 탐방로를 천천히 걸었다. 뒤에서 길을 재촉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한라산도 용눈이오름도 다른 사람을 신경 써야 했는데 통오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는 사뿐하게 춤을 췄고 그걸 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 같은 무덤 몇 개가 능선에 무심하게 있었고 그 앞을 지나갈 때는 웃음을 거뒀다. 찾는 이 없는 오름. 은근하게 자신을 숨기고 있는 오름. 통오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패티 스미스는 사랑하는 남편과 남동생을 한 달 간격으로 잃었다. 남편의 추도식장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녀를 남동생이 위로했다. 그런 남동생이 한 달 후에 죽었다. 패티 스미스는 무너졌다. 그리고 글을 썼다. 그녀가 다시 일어섰는지 아니면 그 자리에 누운 채로 글을 썼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녀가 쓴 책을 읽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녀는 "어째서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리는 걸까? 어째서 심드렁한 것들은 끝까지 우리 곁에 달라붙어 있다가 우리가 가버린 뒤 우리 값어치의 척도가 되어버리는 걸까?"하고 물었다. 그녀의 책은 수많은 질문으로 이뤄져 있다. 나는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주는 잠언집이나 탈무드보다 질문으로 가득한 책이 좋다. 너무 묵혀두었다가 끝내 묻지 못하게 되는 질문들. 그런 질문의 리스트를 만들어본다.


통오름을 내려오면 길 하나 건너에 독자봉이 있다. 통오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오름이다. 갈대밭은 사라지고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통오름보다 찾는 사람이 많은지 화장실과 주차장, 운동시설까지 갖춰져 있다. 이름과 달리 외롭지 않다. 진드기를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무섭다. 고사리철에 길을 잃는 사람이 많다는 경고문이 함께 붙어 있었다. 고사리로 만드는 제주식 육개장이 생각나 괜히 허기가 졌다. 독자봉 정상의 전망대에서 다시 한번 중산간의 마을들을 바라봤다. 도로와 돌담이 중산간을 수십 개의 작은 조각들로 나눠놓고 있었다. 거대한 푸른 벌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 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쩐지 소중한 것들이 자꾸만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갑도 사라졌다. 제주의 새로운 얼굴을 알려준 사진작가 김영갑.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김영갑갤러리두모악으로 향했다. 오래전에 죽었지만 그가 남긴 사진과 공간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요일은 갤러리 휴관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아쉬움이 남아 괜히 앞을 서성거렸다. 쎄콤 마크가 무섭게 노려보는 것 같아서 슬쩍 자리를 피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게 제주는 공기 좋고 물 좋은 휴양지였다. 인스타에 예쁘고 먹음직스러운 사진 찍어 올리기 좋은 곳. 출장 일정이 제주로 잡히면 손뼉 치며 좋아하게 되는 그런 곳. 제주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 김영갑의 사진을 만난 뒤다. 김영갑의 제주 사진은 달랐다. 마냥 예뻐 보이지 않았다. 제주 사진을 찍는 사람이 정말 많지만 김영갑의 사진은 새로웠다. 그게 뭐였을까. 지난 겨울에 김영갑이 쓴 에세이를 읽고서야 알았다. 그건 이어도였다.


"제주 사람들의 의식 저편에 존재하는 이어도를 나는 보았다. 제주 사람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호흡 곤란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을 때 나는 이어도를 만나곤 한다."

김영갑은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면서 갤러리를 지었다. 그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조심스럽게 정성스럽게 버려진 폐교를 갤러리로 바꿔나갔다. 제주의 오름을 지키는 수많은 무덤들처럼 김영갑의 갤러리도 제주를 지키고 있다. 그가 찍은 제주 사진에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이어도가 담겨 있었다. 중산간의 광막한 초원을 찍은 사진에도, 오름을 가득 메운 갈대밭을 찍은 사진에도, 태풍이 몰려오는 마라도의 바다를 찍은 사진에도,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마소를 찍은 사진에도, 한라산의 겨울과 여름을 찍은 사진에도 이어도가 있었다.


이즈미 세이치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제주도와 사랑에 빠진 첫 번째 일본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그는 30년에 걸쳐 제주도의 자연과 풍습을 기록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제주의 민요 중 상당수가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중에는 이어도에 대한 노래도 있다. 뱃일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들의 마음을 담은 노래다. 남편이 이어도에 가서라도 살아남았기를 바라는 노래다. 이어도는 존재한 적이 없지만 존재하지 않은 적도 없는 섬이다. 이어도가 있었기에 제주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들을 괴롭힌 현대사의 굴곡에서도 버티고 살아남은 게 아닐까. 감히 짐작해본다.


김영갑갤러리를 지나서 조금만 더 걸으면 올레길 3코스는 다시 하나로 만난다. 바다와 중산간으로 갈라졌던 길이 하나로 합쳐진다. 왼쪽에 바다를, 오른쪽에 도로를 두고 한참을 걸어야 한다. 풍경이 익숙해지자 잊고 있던 생각들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언제까지 이렇게 일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까. 일을 해야 할까.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싶지는 않은데. 소설은 언제쯤 만족스럽게 쓸 수 있을까. 사람도, 일도 쉽지가 않다.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할 겸 가던 길을 멈추고 바닷가에 앉았다.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들고 물새들이 바위에 모여 있었다. 괜히 휴대폰을 꺼내봤다. 문자도 전화도 없다.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바다는 하나다. 바다가 하나였던 것처럼 정말로 땅도 하나였을까. 베게너가 목숨을 걸고 증명하려고 한 판게아는 정말로 존재했을까. 문득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패티 스미스의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밑줄 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할지 몰라도, 네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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