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_혐오 발언
주디스 버틀러라는 이름만으로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기가 눌려버린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이나 인용된 말들을 여기저기서 듣지만 정작 그의 책을 잘 읽지 않게 되는 이유다. <혐오 발언>은 내가 제대로 마음먹고 읽은 주디스 버틀러의 첫 번째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젠더나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슬쩍슬쩍 본 적은 있어도 한 권을 완독한 것은 처음이다.
걱정했던 대로 책은 어려웠다. 최종적인 메시지 자체가 난해하다기보다는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지난했다. 일단 버틀러가 인용하는 철학적 개념과 이론들이 쉽지 않았다. <혐오 발언>에서 버틀러는 데리다나 푸코를 인용해 레이 랭턴의 주장에 맞선다. 책의 상당 부분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론적인 배경이나 설명에 할애되는데 이 부분을 읽는 게 고역이다. 그나마 데리다나 푸코는 잘 알려져 있기에 그럭저럭 넘어갈 수는 있지만 이름조차 처음 듣는 철학자의 말이 나올 때는 포기하고 싶어진다. 솔직히 다 넘기고 해제만 읽고 끝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혐오 발언>은 읽는 내내 머리를 감싸쥐어야 하지만 읽고 난 뒤에는 청량감이 드는 종류의 책이다. 버틀러의 주장은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간단명료하게 지적한다. 이론적인 배경과 설명을 들어내고 주장만 본다면 말이다.
버틀러의 <혐오 발언>은 1997년에 쓴 책이다. 한국에는 2016년에 번역됐다. 20년의 시차가 있지만 책을 읽는 동안 그런 시차를 느낄 수가 없었다. 2016년의 한국은 말 그대로 혐오 사회였다. 몇 년 전부터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일베 같은 혐오 사이트가 작년에는 백주대낮에 길거리에 스멀스멀 기어 나왔고, 그에 대한 미러링 개념의 메갈리아 같은 사이트도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그뿐 아니라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방식의 혐오가 한국 사회를 가득 채웠고, 혐오가 우리 삶의 한 가지 방식이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버틀러가 제기하는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국가가 혐오 발언을 규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여기에 대한 버틀러의 대답은 '아니오'다. 왜 그런가. 국가 혐오 발언을 규제하게 된다면 무엇이 혐오 발언인지에 대해 규정할 권리도 국가에게 넘어간다.
"혐오 발언이 차별 행위로 간주된다면, 혐오 발언은 법원이 결정해야 되는 문제가 되며, 따라서 '혐오 발언'은 법원이 그렇다고 하기 전까지는 혐오스럽거나 차별적이라고 간주되지 않는다. 혐오 발언이 있다고 판결하는 법원이 있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런 법원이 없다면, 그 용어에 대한 완전한 의미에서의 혐오 발언이란 없는 것이다."(184p)
어떤 발언이 혐오 발언인지 아닌지는 그 발언의 당사자들이 가장 잘 안다. 발언의 화자와 청자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여기에 국가의 규제가 끼어드는 순간 당사자들이 가진 권리는 사라진다. 국가의 판단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자의적인 경우가 많다. 법이 만인에게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국가와 법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한다. 버틀러는 "법적 언어의 정치적인 중립성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지적한다. 버틀러의 말대로 국가의 규제로 혐오 발언을 막겠다는 발상은 상당히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국가는 대체로 보수적이고 불평등하다. 대부분의 혐오 발언이 사회의 약자, 소수자를 향한다는 점에서 국가가 얼마나 중립적으로 혐오 발언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욱이 국가의 규제를 인정하는 순간 혐오 발언을 들은 사람은 법에 호소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을 저항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국가의 규제는 이런 가능성 자체를 없애버린다. 예컨대 '퀴어'라는 말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 표현이었지만 퀴어네이션의 등장과 함께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으로 탈바꿈했다. 법원이 퀴어라는 말의 사용 자체를 막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에 대한 패러디, 전유, 증언 등을 통해 재생산 가능하며 재의미화 가능한 용어들로 전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버틀러의 주장은 논박의 여지가 많다. 레이 랭턴은 버틀러가 말하는 혐오 발언의 재전유가 실제로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말했고 솔직히 현실이 녹록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혐오 발언은 버틀러가 인정하듯이 상처를 주는 말이고 그 상처가 깊어 끝내 일어서지 못하는 피해자도 있다. 그들에게 가서 혐오 발언을 재전유하라고 말하는 건 가당치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버틀러의 주장이 가지는 함의가 상당하다. 한국인은 국가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하다. 개인보다는 집단, 개인보다는 국가라는 사고방식을 어릴 때부터 주입받고 자랐다. 불평등과 갈등을 스스로 풀어내기보다는 국가에 떠넘기는 경향도 강하다. 정말 국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까? 이 모든 불평등한 구조의 산파가 실은 국가였던 건 아닐까? 버틀러의 <혐오 발언>은 혐오 발언 이상의 것들을 고민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