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김현은 문학평론가다. <행복한 책읽기>는 김현의 말년인 1986년부터 1989년까지의 일기를 모은 책이다. 김현의 이름은 역사가 됐지만 그의 글은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린다. 그의 일기는 일상의 이야기에 자신의 독서일지를 더한 것이다. 꼼꼼한 책읽기가 그의 삶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그의 죽음은 잊힌다. 김현은 자신의 글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고종석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를 기꺼이 되풀이해서 읽는다고 했다.
블로크의 '봉건사회1'에 나타나 있는 흥미로운 생각 두 개:
중세에서는 보행자가 말 탄 사람보다 이동 속도가 빨랐다. 그것은 도로 사정 때문이었다.
_3월 4일
김진경의 시에는 아직 뭐라 이름 붙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그래서 단순히 함석헌주의라고 부르고 싶은, 그런 세계관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1) 이 세계는 고난의 자리이다. 2) 그 고난의 자리는 티 없는 하늘을 예비하는 자리이다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내가 그것을 함석헌주의라 부르는 것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의 세계의 하수구로서 한국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그 주의는 이 고난의 땅은 시창작의 명당자리이다라는 서정주류의 미학적 함석헌주의와 고난이 없으면 해방이 있을 수 없다라는 김지하류의 해방적 함석헌주의로 나눌 수 있겠는데, 김진경은 김지하에 가깝다.
_8월 1일
한창기의 귀담아들을 만한 주장 두 개:
아름답다의 아름은 알음알음의 알음, 앎의 대상이다. 아는 물건 같다가 아름답다의 어원이다. 고유섭은 아름을 앎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름은 앎이 아니라 앎의 대상이다.
_10월 11일
복거일의 이야기 중에서 들을 만한 것 또 하나: 가난한 사람들은 눈에 금방 띄는 환부이지만, 진짜 아픈 부분은 몸의 다른 곳이다. 그곳을 보지 못하는 한 총체성은 얻어지지 않는다. 사회라는 거대한 몸속의 가장 아픈 부분은 정치와 돈이 만나는 자리이다.
_1월 6일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무엇을 왜 욕망하는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그 앎에 대한 욕망은 남의 글을 읽게 만든다.
_2월 11일
김훈의 '문학기행 유감'을 읽게 되었다. 그의 글은, 기자의 글로서는 거의 파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 드러냄 때문에 그의 글에 대한 찬반이나, 그의 남의 글에 대한 찬반은 매우 분명하고 확실하다. 그의 글을 보니까. 아버지에 대한 그의 애정/증오가 그의 글쓰기의 밑바닥에 있음을 알겠다. 그는 깊게 사랑하거나 짙게 미워한다. 그는 싸우면서 쉬고 쉬면서 싸운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 같으나, 그 생각난 대로 써진 것들은 훌륭하게 이음새 없이 붙어 있다.
_4월 27일
과거를 상실한 시인에게는 미래도 따뜻하게 열리지 않는다. 있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뿐이며, 거기에서의 탈출은 불가능하다.
_2월 24일
극판은 공식 무대에선 외국 번역물이 판을 치고 소극장에선 반체제 쪽이 판을 치는 이중 구조이지요.
_3월 12일
잘못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읽은 책에 있다는 것
_8월 24일
사진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것이 자료로 남겨져 범죄 증명서가 된다는 것이다! 고발 예술이 협력 예술이 되는 이 모순! 우파의 대두를 가능케 하는 좌파의 모험주의.
_10월 7일
dictator의 어원은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구술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독재자는 혼자 말하는 사람이다.
_11월 24일
말하다는 거짓말하다와 동의어이다.
_3월 1일
기형도에 대해 새로 안 사실들 : 석유 냄새나는 누이는 신문 배달을 하는 누이라는 뜻이다. 신문에서 나는 석유 냄새, 다시 말해 잉크 냄새.
_6월 6일
죽음이 도둑처럼 갑작스럽게 온다면, 그것을 두려워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죽음은 순간순간 온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하나의 도구와도 같다.
_8월 17일
그리고 마지막 일기
새벽에 형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더 커진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 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 살아 있다.
_12월 12일
김현은 이듬해 6월 소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