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

by 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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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홍상수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술에 취한 영희(김민희)는 아무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소리친다. 도희가 꼭 자격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냐고 반발하자 영희는 더 큰 목소리로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외친다. 이 영화는 사랑받을 자격과 사랑할 자격에 대한 이야기다.


알랭 바디우는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을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라고 정의했다. 여기서의 용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도 걸 수 있다는 막무가내 식의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일단 타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타자를 용인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가치를 지우고 평준화시킨다. 규범과 윤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부르짖는 규범과 윤리는 누군가가 가르쳐준 것, 날 때부터 있던 거스를 수 없는 무엇이다. 철학자들이 사랑이 죽었다며 절망적으로 외치는 건 더 이상 타자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 없이 혼자하는 사랑은 나르시시즘일 뿐이다.


홍상수는 이 영화에서 치열하게 사랑을 이야기한다. 다른 말로 하면 치열하게 타자를 찾는 것이다. 홍상수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깜깜한 밤의 해변에서 우주와의 사이에 아무 방해물이 없을 때 보통의 인정과 규범과 분별들이 사라지고 원래의 자신을 잠시 느낄 수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잠시라도 원래의 나를 느낄 수 있다면, 그 순간에는 나와 다른 타자를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끊임없이 타자를 찾으려는 노력인 동시에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는 노력이다. 영희가 함부르크와 강릉의 해변에서 기다리는 존재는 결국 타자다.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찾으려는 욕구가 영희에게는 있다. 그녀는 끊임없이 먹는다. 배고프다. 갈망한다. 사랑을.


진정한 사랑을 찾는 과정에서 법적인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홍상수는 오히려 그런 보통의 인정과 규범, 분별이 사라지는 순간에야 타자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디우도 사랑에 있어 중요한 것이 '둘의 지속'이라고 말했다. '둘의 지속'은 내연관계를 맺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타자를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와 다른 타자와의 만남, 사랑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럽고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타자와의 만남은 언제나 최초의 사건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최초의 사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과 불확실성을 끊임없이 견뎌나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바디우는 불협화음이야말로 사랑의 모순적인 본성이라고 정리했다.


영희 역을 맡은 김민희는 영화 속에 나오는 두 차례의 술자리에서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첫 번째 술자리의 화두는 앞에서도 이야기한 사랑받을 자격이었다. 그녀는 함께 술을 마시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갈하지만 그건 사실 진정한 사랑을 포기하고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는 모두를 향한 것이다. 끔찍한 짓을 수도 없이 저지르면서 정작 진정한 사랑을 찾으려는 사람에게는 손가락질하는 모든 이를 향한 것이다.


두 번째 술자리에서 상원(문성근)은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를 꺼내 영희에게 읽어준다. 그가 읽은 구절과는 다르지만 같은 책에 이런 구절도 나온다.

"그는 저열하거나 아주 평범한 행복의 대가로 삶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를 생각했다."

이 구절을 이렇게 바꿔 읽을 수도 있겠다.

'저열하거나 아주 평범한 행복의 대가로 삶은 인간에게 타자를 포기하고 사랑을 저버리도록 요구했다.'

위태로워 보이고 큰 일이라도 날 것 같은 영희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는 인간 본연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현실에 만족해 환상과 불확실성을 쫓아낸 우리에게는 영희의 모습이 낯설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우리가 그녀를 이토록 욕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누가 뭐라든 영희는, 김민희는 묵묵히 걷는다.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오로지 혼자 살아 있는 것처럼 걷는다. 그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홍상수는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많은 이야기는 이 영화의 앞에 붙은 전주곡에 불과했다. 아니면 리스트Listz의 전주곡에 붙은 서문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하튼 그의 이야기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부터 시작됐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언제나 지질한 남자 캐릭터가 나온다. 이 영화도 다르지 않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홍상수 감독이 그 지질한 캐릭터들을 그저 관조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모습을 그 안에 투영한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욕한다. 늙었다고 욕하고 남자라고 욕한다. 이건 절대적인 큰 변화다. 홍상수는 앞선 영화들에서 그저 관조하기만 했다. 자신의 이야기에 발을 들이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에 들어오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욕한다. 이건 타자를 발견한 사람이 낼 수 있는 용기다. 자아를 파괴해서 타자를 발견하려는 용기다. 그렇게 영화에 윤습함으로써 홍상수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변에 누워 있는 영희를 깨우는 남자의 목소리. 그러다 큰 일 나니까 얼른 일어나라고 영희를 다그치며 일어나게 만드는 남자의 목소리. 그건 홍상수의 목소리다. 전처럼 뒤에서 관조만 했다면 그 장면은 존재할 수 없었다. 영희는 남자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고 몸을 일으키고 어딘가로 걸어간다.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바디우의 글은 <에로스의 종말> 서문과 <사랑예찬>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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