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

고발_반디

by 이기자

수용소는 인간 본성의 실험실과 같다. '인간성'이나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보통 긍정적인 의미로 읽히지만 많은 작가가 거기에 의문을 제기했다. 역사적인 몇몇 수용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례들, 그 안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실은 악마적인 본성을 타고났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로맹 가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지은 독일인이 실은 인간 본연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말했고, 커트 보니것은 외계인이 있다면 지구를 정신병원으로 쓰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모두가 인간 존재 자체를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수용소 문학이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수용소라는 제한된 실험실에서만 발현되는 인간의 모습이 과연 오발탄 같은 예외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가식과 편리 속에 숨어 있던 인간의 진정한 본성인지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13.jpg

수용소 문학이 드문 이유는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이야기를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용소 군도>의 솔제니친과 <콜리마 이야기>의 바를람 샬라모프, <이것이 인간인가>의 프리모 레비까지.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수용소 문학의 작가들은 모두 생사를 가르는 수용소 생활을 경험했다. 그들이 남긴 이야기는 창의력이 낳은 결실이라기보다는 생존을 향한 본능과 끝없는 인내심의 결과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는 증언이 되고 우리는 인간 존재 자체를 재판정에 세우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를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수용소에는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의지가 없기에 정신병자도 없고 범죄자도 없다. 모두가 생존에만 매달리게 된다. 대가뭄의 현장에서 물냄새를 따라 먼 길을 나서는 들소 떼와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레비는 "우리는 모두 패배했다"고 썼다. 수용소에서는 살아남는 사람도 죽어버린 사람도 결국 모두 패배한 것에 불과하다. 고된 노동과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더라도 수치심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샬라모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모든 인간의 감정-사랑, 우정, 선망, 박애, 자비, 명예욕, 정직은 오랜 굶주림 동안 몸에서 빠져 달아나는 살과 함께 우리를 떠나 버렸다"고 적는다. 그는 수용소의 오래된 격언을 기억한다. 수용소에서 사람을 죽이는 건 적은 식량 배급이 아니라 많은 식량 배급이다. 수용소는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킨다.


그리고 또 한 권의 수용소 문학이 있다. 반디라는 익명의 작가가 쓴 <고발>이라는 단편집이다. 북한에 살고 있는 작가가 묘사하는 북한 사회는 그 자체가 거대한 수용소다. 작가는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여행증이 발급되지 않아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아들, 불행한 현실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남편 몰래 피임약을 먹는 아내, 창 밖으로 보이는 마르크스와 김일성의 거대한 초상화를 보고 경기를 일으키는 갓난아기, 그 갓난아기 때문에 창문에 커튼을 쳤다가 평양에서 쫓겨나는 부부, 김일성이 참석하는 1호 행사 때문에 기차역에 발이 묶였다가 다리가 부러진 손녀. 반디의 소설에 나오는 북한 사람들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그들은 아픈데도 하하하 웃어야 하고 간지러운데도 엉엉 울어야 한다. 반디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수용소를 경험한 작가일 것이고 <고발>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수용소를 묘사한 소설집일 것이다.


우리는 북한 문제를 미국이나 유럽처럼 객관적으로만 바라볼 수가 없다. 북한은 우리의 동족인 동시에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적이기도 하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눈물을 흘리다가도 핵실험 소식에 치를 떨게 된다. 이렇게 북한에 대한 복잡한 이해 속에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거기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뉴스로는 접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고발>은 그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조난 신호를 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