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걷다걷따

여름을 닮은 바젤의 미술관들

스위스 바젤 여행기

by 이기자

혼자서 여행하는 일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고 김연수 작가가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여행 산문집 <언젠가, 아마도>에 나오는 말이다. 김연수 작가는 중국 옌지를 혼자 여행했는데 도무지 혼자서 시간을 보낼 만한 공간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책을 읽다보니 예전에 몇 번 중국을 다녀온 기억이 떠올랐는데, 혼자서 다녔을 생각을 하니 막막해졌다.


혼자서 여행하는 일의 고단함. 그렇긴 하지만 김연수 작가가 같은 책에 썼듯이 혼자서 여행하는 일의 묘미도 바로 이 고단함에 있다. 혼자서 하루 종일 무얼 하고 시간을 보낼지 고민해야 하는 그 막막함에 어찌보면 여행의 묘미가 담겨 있는 걸 수도 있다.


지난 7월말 일주일간 스위스 바젤을 다녀왔다. 회사 일로 다녀온 출장이었지만 여유롭게 일하는 유럽 사람들의 특성 덕분에(?) 오후 즈음에는 늘 하루 업무가 끝났다. 해가 아직 쨍쨍하게 떠 있는 오후 서너시에 낯선 스위스 땅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으니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연락할 친구 한 명 없는 곳에서 휴대폰의 구글 지도를 열심히 노려보며 어디를 갈지 고민했다. 혼자서 돌아다녀도 괜찮은 곳, 무거운 노트북 가방을 맡길 수 있는 곳, 에어컨 바람이 선선하게 나오는 곳, 비싼 돈을 들이지 않고도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는 곳이어야 했다. 그렇게 잠깐 동안 고민을 해보니 답이 나왔다. 딱 하나. 미술관밖에 없었다.

KakaoTalk_20180823_201351751.jpg 여름의 스위스
KakaoTalk_20180823_201352011.jpg 여름의 스위스2
KakaoTalk_20180823_201647096.jpg 매년 아트바젤이 열리는 바젤 메세
KakaoTalk_20180823_201648950.jpg 라인강변의 바젤 대성당

미술관은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들의 천국이 분명하다. 시원하고 편안하고 지적으로 충만해질 수 있고 서울에 있는 지인들에게 줄 선물도 살 수 있다. 미술관이 혼행족의 천국이라면, 바젤은 미술관의 천국 중에서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한 도시가 분명하다. 바젤에 도착한 둘째날 오후, 더위에 쫓기듯 서둘러 들어간 미술관은 바젤 시립미술관(kunstmuseum basel)이었다.


바젤 미술관은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공공미술관이다. 유럽의 공공미술관들이 그러하듯이 어마어마한 컬렉션과 규모를 자랑한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에서 시작해 조금이라도 이름난 화가의 작품은 한 두개는 있었던 듯싶다. 그중에서도 눈길이 갔던 건 피카소와 고흐, 칸딘스키의 작품들이었고, 스위스의 국민 예술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들을 전시해놓은 방도 인상적이었다.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미술관을 돌아보고(반도 못 보고 포기..) 1층 소파에 앉아 있는데 늦은 오후의 햇살이 미술관 중정에 쏟아졌다. 유럽의 햇살은 어찌나 결이 부드러운지. 불과 몇 시간 전에 더위 때문에 고생해놓고도 다시 햇살 사이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러 담아야 했다.

DSC03808.JPG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들
KakaoTalk_20180823_201648117.jpg 로댕의 작품이 곳곳에 있다
KakaoTalk_20180823_201647957.jpg 에어컨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던 커튼
KakaoTalk_20180823_201647804.jpg 보다시피 고흐
KakaoTalk_20180823_201648572.jpg 낮의 햇살과 식물의 그림자

다음 날에는 트램을 타고 조금 멀리 나갔다. 바젤 시내에서 20분 정도 트램을 타고 나가면 바이엘러 재단의 뮤지엄(Beyeler Foundation Museum)이 모습을 드러낸다. 재단 설립자인 언스트 바이엘러는 세계적인 미술품 수집가인데, 이 미술관은 그의 개인 소장품을 모아놓은 곳이다. 개인 소장품을 모아놓은 곳인데, 무려 피카소, 모네, 칸딘스키, 자코메티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돌아가며 전시한다. 무려...


바이엘러 뮤지엄은 중부 유럽 특유의 광활한 옥수수 밭을 옆에 두고 나지막하게 지어져 있다. 길이가 제법 긴 단층 건물인데 전시실 어디를 가나 자연광이 충분하게 들어올 수 있게 설계를 했다. 스위스의 여름 햇살이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과 어우러지는 모습을 어디서든 볼 수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뮤지엄 건물을 설계한 이가 렌조 피아노였다.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설계한 렌조 피아노. 자연과 예술을 기가 막히게 조화시켜놓은 모습에 역시나 거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다녀온 제주의 유민미술관에 이어 또 다른 미술관 건축의 극상을 체험한 기분이었다.


바이엘러 뮤지엄은 모네의 수련 연작이 있는 걸로도 유명하다. 특히 수련 연작이 있는 전시실 바로 밖에 연못이 있고 통유리창으로 그 모습이 보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고, 자연은 예술의 영감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DSC03851.JPG 바이엘러 뮤지엄
DSC03849.JPG 바이엘러 뮤지엄
DSC03857.JPG 바이엘러 뮤지엄
DSC03859.JPG 바이엘러 뮤지엄
DSC03860.JPG 바이엘러 뮤지엄
DSC03841.JPG 바이엘러 뮤지엄
DSC03845.JPG 바이엘러 뮤지엄
KakaoTalk_20180823_201649867.jpg 바이엘러 뮤지엄

귀국 전날에는 라인강변에 있는 팅겔리뮤지엄을 다녀왔다. 장 팅겔리의 작품을 모아 놓은 곳인데, 팅겔리는 지금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니키 드 생팔展'의 주인공 니키 드 생팔의 남편이다. 부부가 모두 독특한 작품 세계를 가진 걸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팅겔리는 못 쓰는 기계나 고철을 모아서 움직임과 소음을 내는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키네틱 아트의 선구자 중 한 명이기도 한데, 팅겔리뮤지엄에는 그의 독특한 작품들을 실컷 만날 수 있다.


사실 팅겔리뮤지엄에서 팅겔리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소품 같은 재즈 공연이었다. 커다란 전시장을 아예 공연장으로 꾸며서 재즈 뮤지션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기획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미술관이 단지 오래된 예술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서 예술이라는 하나의 끈으로 많은 사람을 한데 묶어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한국의 미술관들을 갈 때마다 특유의 엄숙주의가 거북했는데, 팅겔리뮤지엄에서는 모두가 자연스럽게 예술을 즐기는 것 같아 좋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관람을 방해하지도 않는, 절제된 자연스러움이 곳곳에 배어 있다고 해야 할까.

DSC03937.JPG 팅겔리뮤지엄
KakaoTalk_20180823_201651151.jpg 팅겔리뮤지엄
KakaoTalk_20180823_201651370.jpg 팅겔리뮤지엄
DSC03945.JPG 팅겔리뮤지엄
DSC03949.JPG 팅겔리뮤지엄
DSC03958.JPG 팅겔리뮤지엄
DSC03971.JPG 팅겔리뮤지엄
DSC03974.JPG 팅겔리뮤지엄

이런 자연스러움은 팅겔리뮤지엄과 연결돼 있는 라인강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많은 바젤 시민들이 더위를 피해 수영복을 입고 라인강변에 몰려들었다. 강변에 위치한 팅겔리뮤지엄은 자연스럽게 피서객들을 위한 그늘막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뮤지엄 건물이 제공하는 그늘 아래에서 햇살을 피하면서도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주의했다. 수영복을 입은 피서객과 뮤지엄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세계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었다. 팅겔리가 추구하던 예술 세계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좋은 기억을 가지고 팅겔리뮤지엄을, 바젤을, 스위스를 떠나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미술관의 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