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에게 배우는 싸움의 기술

서른한 번째 리뷰_성석제의 위풍당당

by 이기자

이야기꾼의 본분은 무엇인가?

그저 사람을 울고 웃게 하는 기술에만 능하다면 그는 A급 이야기꾼이다. S급 이야기꾼은 '공동체의 삶의 조건에 대한 예리한 이해와 더 나은 삶을 향한 희구'를 품고 있다. 성석제가 S급 이야기꾼인 이유다.


'위풍당당'에서 성석제는 이야기를 자르고 이어 붙이고 비틀고 꼬아낸다. 이 와중에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삶이 독자들 앞에 한 편의 종이인형극처럼 펼쳐진다. 남편이 죽고 난 이후에야 자신이 남편의 조화(造花)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희, 남편의 성폭력을 견디다 못해 도망친 이령, 부잣집 도련님에서 한 순간에 가난뱅이로 전락한 영필... 위풍당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위풍도 없고 당당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들이 하나로 뭉치는 순간 도시에서도 이름 깨나 날리던 조폭들을 물리치는 힘을 발휘한다. 단순한 풍자와 해학을 넘어선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순간이다.


여산이 이끄는 마을 사람들과 정묵이 이끄는 조폭들은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조폭들은 번쩍번쩍한 패션 센스를 보여준다. 베르사체 선글라스, 아르마니 넥타이, 페라가모 구두, 카르티에 시계로 온 몸을 두른 조폭들은 검정색 벤츠를 타고 나타나 시골마을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을 상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초라한 행색과는 비교할 수 없다.


같은 이야기를 할 때도 마을 사람들과 조폭들의 사고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여산은 새미와 준호를 마을에서 내보자는 영필에게 "가족이 뭐냐요, 아자씨?"하고 묻는다. 정묵 또한 조폭 세계에서 통용되는 가족의 의리를 말한다. 같은 말이지만 뜻은 다르다. 조폭 세계의 가족은 철저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 조폭들은 한 식구를 외치지만 쓸모없는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가족이라고 하지만 가족 관계를 유지할 능력이나 필요성이 없으면 버려지고 배제된다. 마을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마을을 위험에 빠뜨린 새미와 준호를 큰 고민 없이 감싼다. 여산과 정묵의 마지막 일대일 대결에서 여산이 반전의 계기를 잡은 것도 이런 신뢰에서 비롯된 준호의 고함소리 덕분이다.


문학평론가 차미령은 위풍당당 작품 해설의 제목을 '싸움의 철학'으로 달았다. 위풍당당은 여산이 이끄는 마을 사람들과 정묵이 이끄는 조폭들의 한 판 대결을 향해 달려가는 소설이다. 하지만 여산도 정묵도, 마을 사람들도 조폭도 결국은 더 큰 싸움을 앞두고는 한 편, 혹은 한 켠에 서야 한다.


여산과 정묵이 일대일 대결을 펼치며 소설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불도저와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와 덤프트럭 수백 대가 강변의 흙길을 따라 열을 지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들은 '군대처럼 밀고 들어온다. 마을이 생긴 이래, 강이 생긴 이래 이토록 많은 내연기관이 한꺼번에 진주한 적은 없었다. 무엇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밀고 들어온다. 새들이 울부짖고 곤충들은 달아난다'.

거대한 기계 괴물 집단은 많은 것들을 대변한다. 돈과 법을 내세운 개발논리 앞에 자연은 맞설 힘이 없다. 그들 앞에서는 여산이나 정묵이나 똑같은 사회의 부속물, 고장 난 부품일 뿐이다. 여산과 정묵은 연대하지 않지만 언젠가 서로의 힘을 빌려야 할 수도 있다.

성석제가 S급 이야기꾼인 이유가 여기에서 나타난다. 성석제가 알려주는 싸움의 철학, 싸움의 기술은 가족과 연대에 있다. 사실 성석제의 지난 몇 년은 조용했다. 해학과 풍자는 빛을 잃었고, 작가 스스로도 재미가 없어졌다. 왜 그럴까. 작가 스스로 변해버린 한국 사회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 수 있고, 변해버린 한국 사회에 맞서 싸울 더 정교한 수단과 방법을 모색했을 수도 있다. 어떤 쪽이든 성석제는 고민을 끝내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하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싸움의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자명한 사실이다. 사람들을 핍박하고 연대를 막는 이들, 돈과 권력을 손에 쥔 이들과의 싸움이다. 그들은 정묵이 이끄는 조폭들처럼 단순하지도 무력하지도 않다. 조폭들이 봉래산을 한참 돌아 힘들게 걸어 들어왔다면, 그들은 수많은 내연기관 기계를 앞세울 수 있는 힘이 있다. 성석제는 그들과 맞서 싸울 철학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들에게 맞서야 하는가. 강이 있기 때문이다. 위풍당당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총천연색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배경에는 강이 있다. 여산이 잠수복을 입고 민물고기를 잡아오는 바로 그 강이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이다. 성석제는 "강은 평시에 소리 내는 법이 거의 없다"며 강의 법도를 말한다. 강의 법도는 무한정의 기다림이나 참을성에 있지 않다. 성석제는 소설의 마지막에 경고한다.


은사시나무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다. 천천히 길어지며 천천히 옅어진다. 곧 원유처럼 짙고 끈끈한 어둠을 데리고 밤이 올 것이다.

강이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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