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스러운 예술이란 없어."

서른두 번째 리뷰_로맹가리 유럽의 교육

by 이기자

하얀 숲이다. 아니, 하얀 눈으로 뒤덮인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이다. 이 숲에서 자유가 힘겹지만 필사적으로 숨을 이어가고, 소년은 성장한다.


로맹 가리의 첫 소설인 '유럽의 교육'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다. 독일군에 저항하기 위해 숲에 숨어든 빨치산들의 이야기다. 소설 속 빨치산 대원인 즈보로브스키의 말처럼 "자유는 숲의 딸이지. 자유가 태어나는 곳도 숲이고, 위험에 처했을 때 자유가 숨어드는 곳도 숲"이다.


열네살 소년 야네크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두 형제를 잃고 숲에 마련된 은신처에서 살아 남는다. 며칠이 지나도 아버지가 오지 않자 야네크는 은신처를 나와 빨치산들을 만나러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 열네살 야네크는 빨치산이 누군인지, 독일군이 무슨 일을 하는지, 스탈린그라드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일뿐이다.

이 슬픈 소설은 야네크의 성장기인 동시에 인간 존재에 대한 로맹 가리 고민의 출발점이다.

야네크는 로맹 가리가 쓴 또 다른 소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인 모모와 같은 나이다. 모모와 야네크는 맞닿아 있다. 야네크가 질문이라면 모모는 해답이다. 유럽의 교육이 출간된 1945년과 자기 앞의 생이 출간된 1976년 사이에는 31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첫 소설인 유럽의 교육에서 야네크의 입을 통해 던진 질문에 31년 뒤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의 입을 통해 대답한 것이리라.

슬프고 영민한 작가는 자기 앞의 생이 출간되고 4년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는 짧은 유서에서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고 고백하는데, 나는 이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로맹 가리 평생의 고민이자 화두였던 인간 존재에 대한 희망은 자기 앞의 생에서 온전하게 발견된다.

"사랑해야 한다."


모모와 달리 야네크는 불완전하다. 알껍질을 뚫고 나오려는 아기새의 모습처럼 때로는 처참하고 때로는 감탄스러우며 때로는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음악에 사로잡힌 야네크는 전쟁 이후를 위해 글을 쓰는 대학생 빨치산 대원 도브란스키에 공감하면서도, 자신에게 닥친 고통과 시련에 좌절한다. 야네크는 갈수록 희망과 선의를 잃어간다. 야네크를 사랑하는 조시아는 그의 마음 속에서 사랑의 불빛이 점점 사그라드는 것을 느낀다. 늑대의 울음소리와 겨울숲의 칼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야네크는 인간에 대한 희망, 인간의 선의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바이올린 신동인 유대인 꼬마아이 모니에크는 도시의 시궁창에서 도망치지만 거대한 자연 속에서 길을 잃는다. 때때로 자연은 인간만큼 잔인할 수 있다.


이 모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네크는 마음 속의 마지막 불씨만은 꺼뜨리지 않는다. 도브란스키는 죽어가면서 자신이 쓰고 있는 '유럽의 교육'을 야네크가 이어서 끝까지 써주기를 바란다. 도브란스키는 죽어가며 야네크에게 말한다.

"나는 믿어. 이번엔 다를거야. 이제는 되풀이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빛을 향해 가고 있어."

"중요한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오직, 인간과 나비들만이..."

"그들에게 굶주림과 무시무시한 추위, 희망과 사랑에 대해 얘기해줘."

"나는 그들이 우리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자신들을 부끄러워했으면 좋겠어..."


야네크는 도브란스키의 마지막 부탁을 받아들인다. 그의 마음 속 불씨가 살아난다. 조시아는 그의 아이를 낳는다. 개미들은 끊임없이 잔가지를 들고 걸어간다. 역사란 개미들의 작디작은 발걸음이 모여 만들어졌다. 로맹 가리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메모들


"늑대를 숲에서 나오게 만드는 것은 굶주림만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기도 하다."

-가울라이터 코흐

19p


언젠가 즈보로브스키가 한 말이 생각났다. "자유는 숲의 딸이지. 자유가 태어나는 곳도 숲이고, 위험에 처했을 때 자유가 숨어드는 곳도 숲이거든."

64p


"독일은 왜 우리한테 그런 짓을 하는 걸까요?"

"절망 때문이지. 좀 아까 페흐가 하는 말 들었지? 사람들은 서로 멋진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이어 그 이야기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그들은 그것으로써 신화가 현실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페흐 역시 절망에 빠지려 하고 있어. 독일 사람들만 절망하는 게 아니야. 절망은 어디에나 떠돌고 있어. 옛날부터,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절망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절망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면 인간은 곧장 독일인이 되는 거야.

(중략) 진실은 역사의 순간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과 같은 시간 속에 있어. 그런 때에는 인간이 절망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모든 것, 인간에게 믿음을 갖게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주는 모든 것이 은신처를, 피난처를 필요로 하지. 나는 내 책이 그런 피난처 중 하나가 되기를 바라. 전쟁을 겪은 후, 모든 것이 끝난 후 그 책을 펼 때 사람들이 아직 다치지 않고 남아 있는 자신들의 선의를 다시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 저들이 우리를 짐승처럼 살게 했지만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원해. 절망한 예술이란 없어. 절망스러운 것, 그건 오직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뿐이야."

88p


고통을 겪는 데 '마지막'은 없었다. 그리고 희망은, 새로운 고통을 견뎌내도록 인간을 격려하기 위한 신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225p


야네크가 도브란스키에게 물었다.

"러시아 사람들을 사랑해요?"

"나는 모든 국민을 사랑해." 도브란스키가 말했다. "하지만 어떤 나라도 사랑하지 않아. 나는 애국자지만 국수주의자는 아니야."

"뭐가 다르죠?"

"애국심은 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이야. 국수주의는 다른 나라에 대한 증오고. 러시아, 미국, 모든 나라..... 세계에 위대한 형제애가 싹트고 있어. 독일군은 적어도 우리에게 그런 걸 가져다주기는 한 셈이지."

296p


"추악한 짓을 벌이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해요." 야네크가 화가 나 말했다. "타데크 흐무라가 옳았어요. 유럽에는 가장 오래된 성당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대학들, 가장 커다란 도서관들이 있어요. 그래서 거기서 가장 훌륭한 교육이 이루어지죠. 세계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유럽을 찾아와요. 공부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그 유명한 유럽의 교육이 가르치는 것은 결국, 자기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을 죽이는 데 소용이 될 만한 그럴싸한 이유들과 용기를 찾아내는 법일 뿐이에요. 얼음판 위에 스케이트를 신고 앉아서,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방아쇠가 당겨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요."

3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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