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다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죽지는 않아"

서른네 번째 리뷰_사랑하는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삶

by 이기자

스탕달은 '사랑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새로 발명된 깃펜깎이를 오늘 오전에 샀어요. 깃펜을 깎을 때 번거롭지 않아서 정말 기쁘더군요. 하지만 그 물건의 존재를 몰랐을 때도 나는 불행하지 않았어요. 페트라르카가 고작 커피를 못 마셔봤다는 것 때문에 불행했겠어요?"


사랑은 무엇일까. 제발트는 자신의 소설에서 주인공 벨(스탕달)의 입을 빌려 "사랑은 스스로 만들어낸 통화에 의해서만 부채 상환이 가능한 열정, 즉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허상의 거래"라고 말했다. 허상이라도 사랑은 그림자를 만들고, 눈 위에 남은 발자국처럼 흔적을 남긴다.


사이먼 밴 부이는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딸을 키우는 싱글 대디다. 밴 부이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삶'이라는 소설집은 19개의 이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출판사의 책 소개를 빌리자면 '예기치 않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추억에 젖은 채 과거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밴 부이는 이별에 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누구나처럼.

사랑하는 사람(연인, 부부, 부자, 모자, 갖지 못한 아이까지도)과의 이별은 어디에나 있다. 그걸 극복하는 사람과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뉠 뿐이다. 밴 부이는 조용히 속삭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이별하고 나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행복해도 된다고. 어쩌면 사랑은 떠나보낸 뒤에야 본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해안가로 밀려오는 거센 파도보다는 모래사장에 부서진 채 조용히 바다의 심연으로 돌아가는 파도의 잔재에 실려 있는 것, 그런 게 사랑일 수 있다고 밴 부이는 말하고 있다.


밴 부이는 일상의 작은 변화, 떨림, 흔들림을 놓치지 않는다. 일상의 세세한 모습들과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이런 소소한 위로가 '작은 새들'에게 힘이 된다. 아마 우리는 살면서 아무리 적어도 대여섯 번, 많으면 열 번 이상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게 되리라. 이 책은 백신이 될 수도, 치료제가 될 수도 있다.


밴 부이의 글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단순히 묘사가 뛰어난 수준을 넘어서서 밴 부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삶의 어떤 진실된 부분을, 조금이나마, 아주 잠시나마 응시한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밴 부이의 글을 통해 그 진실된 지점을 상상만 해볼 뿐이다. 그 지점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이지 아름답다. 어떤 순간에는 숨이 막힐 정도다. 그래서 '밴 부이는 위험한 작가'라고 누군가가 말했나 보다.


특별히 아름답다고 느낀 몇 구절을 옮겨본다.


한 여자가 남편이 미는 휠체어에 앉아 다리를 건너간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다. 휠체어의 뒷바퀴만 바닥에 닿아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남편이 마치 잔에 담긴 아내를 마시기라도 할 듯이, 휠체어를 자기 쪽으로 살짝 기울여 밀고 있다. 남편이 아내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는 작은 구름 조각을 붙잡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다.

-14p, 작은 새들


아버지는 깊은 물속에서 끌려 올라온 물고기가 수면 위를 번개처럼 튀어 오르는 이유는 햇빛을 처음 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존재조차 상상할 수 없던 아름답고 시원한 풍경 속으로 내던져진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보라.

-40p, 하늘만큼 깊고 깊은


지하철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서자 에드거는 남자의 손을 잡고 지하철에 탔다. 그들은 어느 소년과 어머니 옆자리에 앉았다. 소년의 어머니는 피스타치오 껍질을 까서 알맹이를 가방에 담고 있었다. 소년은 무릎에 농구공을 올려놓고 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소년의 어머니는 임신 중이었다.

"모든 비밀은 저 안에 있단다."

남자가 그 여자의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에드거도 불룩한 배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에드거도 그 따뜻한 집 안에 들어 있었겠지.

"우린 하나의 자궁을 떠나 또 다른 자궁으로 옮겨 가는 것뿐이란다."

이렇게 말하며 남자가 웃었다.

-84p, 그들이 숨은 곳은 영원한 수수께끼

movie_image (1).jpg 커버 이미지와 이 사진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장면들. 가장 아름다운 사랑 영화다. 내게는.

별들은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수백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별빛이 우리가 있는 이곳에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려. 그래서 우리가 보고 있을 때쯤에는 이미 소멸한 경우도 있지."

"그러면 저 별들 중에 어떤 별들은 이미 죽은 건가요?"

"모든 게 다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죽지는 않아, 에드거. 중요한 건, 저 별들이 살아 있든 아니든 바로 지금 너무나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는 거란다."

-85p, 그들이 숨은 곳은 영원한 수수께끼


공원의 식물들은 대부분 머리에 한 줌의 눈을 아슬아슬하게 이고 있었다. 사보네는 겨울이라 만개한 꽃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쩌면 지금껏 잘못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꽃들은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게 아니라 달빛 속에서 피어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114p,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꽃


내가 영혼 없는 저 하늘의 존재들이 우리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해 언급하자, 마그다는 총명하게 웃으며 가끔 추억은 닻을 내린 채 뒤처져 있곤 한다고 말했다. 마그다는 흰 옷 차림으로 잔디 볼링을 하는 노인들을 보는 게 그래서 좋다고 했다. 노인들은 시간의 흐름에서 빗겨나 과거를 맴돌고 있기 때문에.

-175p, 모든 것은 아름다운 속임수


<투명 인간>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치직치직 소리가 나는 1930년대 영화다. 어느 날 밤, 루시와 함께 그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워낙 늦은 시간에 한지라 시작한 지 5분 만에 루시는 잠이 들고 말았다. 제럴드는 부드럽고 따뜻한 돌멩이처럼 콩닥거리는 루시의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대로 안아 올려 침대로 데려가는데 살짝 잠이 깬 루시가 투명 인간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제럴드는 마침 내린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바람에 투명 인간이 붙잡히고 말았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루시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정말 아름다운 내용이네요'라고 중얼거렸다.

-240p, 다시 한 번


누구에게나 시시각각 거부당하는 순간과 받아들여지는 순간은 찾아온다. 알에서 부화해 알껍데기를 평생 이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우리는 그런 순간들을 늘 짊어지고 살아간다.

-276p, 고요히 낙하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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