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위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이다

37번째 리뷰_개인주의자 선언

by 이기자

문유석 판사(이하 문유석)는 두 번째 단행본 <개인주의자 선언>의 첫머리에서 "인간 혐오증이 있다고까지도 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라고 당부한다. 이 책은 지금 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의 '인간 혐오증'에 대한 고백과 '서로의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당부 사이에 있다. 지극히 멀어 보이는 이 간극을 촘촘하게 메꿔준다. 문유석이라는 한 사람의 일상과 고민, 그리고 탁월한 글쓰기 재능 덕분이다.


개인

문유석은 자신의 개인주의적 성향에 대해 고백한다. 눈치와 체면과 모양새와 뒷담화와 공격적 열등감과 멸사봉공과 윗분 모시기와 위계질서와 관행과 관료주의와 패거리 정서와 조폭식 의리와 장유유서와 일사불란함과 지역주의와 상명하복과 강요된 겸손 제스처와 모난 돌 정 맞기와 다구리와 폭탄주와 용비어천가와 촌스러움과 기타 등등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에서 '개인주의자'를 자처하는 문유석은 쉽게 섞이지 못 한다. 그는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도 그 근본이 되는 개인주의는 배척하고 있다며 분노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문유석이 말하는 개인주의는 애초에 존립 불가능한 개념일 수 있다. 서구사회의 개인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종교 운동과 중세 봉건 사회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변화가 함께 나타난 덕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전 국민의 일상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유교라는 사상이 건재하고, 기독교와 불교 등 거의 모든 종교가 이상하게 뿌리를 내린 한국 사회에서 서구식 개인주의를 부르짓은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시대적 변화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는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근대화에 돌입했고, 이 과정에서 개인을 위한 사회제도나 윤리를 마련할 여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문유석이 말하는 개인주의는 한국 사회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문유석의 말대로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25p)

많은 사람이, 특히 청년들이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인다. 헬조선을 외치지만 정작 청년층은 한국 사회를 떠나지 않는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는 돌연변이에 속할 뿐이다. 대부분의 청년들은 계나의 친구인 경윤이나 은혜처럼 욕하면서 머무른다. 떠나지 않아도 좋다. 다만 문제를 마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풀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문유석이 개인주의를 외치는 것은 당면과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의미다.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타인

문유석은 인간 혐오를 고백했지만,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인간 혐오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가 혐오하는 것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 하게 하는 찌꺼기들, 매일 같이 쓰다 보면 어느새 쌓여 있는 하수구의 찌든 때,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일상을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말과 행동과 태도에 배어 있기 마련이다.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고, 타인의 삶의 방식을 비난하고, 타인의 존재가치를 폄훼하는 그런 일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문유석은 타인을 발견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개인주의자 선언>의 2부에서 자신의 경험과 판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을 인용하며 타인의 존재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옴진리교에 가담한 명문대 출신 연구원들의 이야기, 비정규직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대학생들, 사건당사자를 위축시키는 법관들...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 모든 이야기 중에서도 나는 베트남 여성 후안마이의 죽음에 눈물 흘렸다. 후안마이는 2007년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 6개월 만에 남편에게 구타당해 죽은 베트남 여성이다. 후안마이는 열아홉의 나이에 죽었는데 갈비뼈 18개가 부러진 채 죽었다. 후안마이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남편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려 했고, 남편의 음주와 폭행을 이해하려 했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후안마이는 죽기 전날 남편에게 베트남어로 편지를 썼다.

(http://cafe.naver.com/family0801/541)

후안마이는 2007년에 죽었지만, 우리 사회에는 제2, 제3의 후안마이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얼마 전 서울 구로에서는 한국인 남성이 자신의 베트남인 전처와 딸을 죽이고 자신은 다리에 목을 매 죽는 일이 있었다. 문유석의 말대로 "이 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수치를 모르는 일"이다.


진실

진실은 불편하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에 나오는 프레만 보스 안와르 콩고는 자신의 손으로 공산주의자 1000명을 죽였다고 자랑한다. 칼 대신 전선을 목에 감아 죽이는 혁신적인 방법을 발견한 것이 자신이라며 카메라 앞에서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들은 이념을 이해하지 못 한다. 인간 본성의 90%가 침팬지에 가깝다고 하는데, 이런 이들은 나머지 10%가 90%에 침식됐다고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 많은 일에 이성과 이념을 앞세우지만, 정작 세상의 대부분은 본성에 따라 좌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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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은 영화 <제보자>를 언급하며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 자문한다. 그는 "악마와 싸우는 건 차차리 쉽다. 선량한 사람들의 절실한 희망과 맞서야 한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일까. 그것이 거짓 희망일지라도 말이다"라고 말한다.


수학에는 정리가 있지만 세상에는 정리되지 않는 일 투성이다. 우리는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누군인지도 모른 채 매일 아침 일어나 창과 방패를 들고 하루 종일 들판을 힘겹게 걸어 다녀야 한다. 어쩌면 우리를 괴롭히는 유일한 적은 우리가 들고 있는 그 창과 방패일지도 모르는 데 말이다.


문유석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잠들지 않게 서로 깨워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낙관주의를 말하고, 휴머니즘을 말하고, 북유럽 사회의 문화적 전통들을 말한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의 중심에는 연대감이 있다. 에볼라 바이러스에 맞선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토머스 프리든 소장은 "낯선 것에 대한 공포가 우리의 연대감을 이길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문유석도 같은 목소리를 낸다. "우리 하나하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문유석은 사회와 공동체를 사랑한다. 나는 그의 선언문을 퍽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었지만, 그의 낙관적인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성의 노력이나 도덕 원칙을 지키는 능력이 아니라, 유독 파괴적이고 약탈적인 종이라는 점'(존 그레이, 호모 라피엔스)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유석이 강조하는 부분들,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키워드,에는 공감한다. 인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지는 못하겠지만, 퇴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꾸준히 걸어야 한다. 최소한 내 아이에게 내가 살던 시대보다 퇴보한 시대를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문유석의 마지막 말에 나 역시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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