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대해

39번째 리뷰_벤투의 스케치북

by 이기자

기록되지 않은 것, 기록됐으나 전해지지 않는 것,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잊혔지만 단 한 사람의 기억 속에라도 살아있는 무언가.

시간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예술작품들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 우리는 그 위대함을 경배하기 위해 미술관을 찾고, 책을 사고, 때로는 많은 돈을 지불하고 비행기를 타기도 한다. 하지만 존 버거는 예술의 위대함을 살아남은 것들에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잊힌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위대한 예술의 시대에 '사소한'것으로 치부됐던 것들이야 말로 실은 더 아름다웠을 수 있다.


존 버거의 <벤투의 스케치북>은 벤투라고 불렸던 사나이, 스피노자의 잊힌 스케치북에 대한 이야기다. 존 버거는 스피노자의 잊힌 스케치북을 찾았다는 전제 하에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위대한 철학자의 스케치북에 어떤 드로잉이 있을까,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독자들은 존 버거를 따라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벤투의 스케치북에 빠져든다. 스피노자 그 자신도 당대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은 부재한 것들이 현재에 얼마나 아름답게 실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로스만의 <모든 것은 흘러간다>에는 강제수용소 출신의 노인이 에르미타즈 궁을 찾는 이야기가 나온다. 노인은 미술관의 마돈나 목상을 보고 한탄한다. 그가 청년에서 노인이 되는 그 긴 시간 동안 마돈나의 아름다운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노인은 "너무 근사한 마돈나의 얼굴은 왜 나이를 먹지 않은 걸까. 왜 그 눈은 그동안 흘린 눈물로 멀어 버리지 않은 걸까. 어쩌면 그 불멸성-영원함-은 강점이 아니라 약점이 아닐까. 어쩌면 그런 식으로 예술은 자신을 낳은 인간들을 배신하는 것일까"라고 읊조린다.


존 버거는 벨리댄스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그는 벨리댄스의 본성을 '숨어 있는 것'에서 발견한다. 스트립댄스와 달리 벨리댄스는 내향적인 것, 숨어 있는 것이어서 아름답다.

"벨리댄스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본성상, 숨어 있다. 몸 안에 존재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무용수들은, 벨리댄스를 추는 최고의 상태는 막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라고 말한다. 숨은 것이 신비로움을 감싸는데, 이 신비로움은 미래이고, 이 신비로움이 연속성을 대변한다."(76p)

BergerBike.jpg 파리 남동부 교외지역에 사는 루카의 자전거. 60년도 더 된 자전거다.

브레히트의 <K씨 이야기>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반복된다. K씨 이야기에는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 철학자들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소피스트 철학자들의 끝날 줄 모르는 거만한 이야기들을 유심히 듣고 있던 소크라테스가 마침내 앞으로 나와 말한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입니다! 그 한마디에 귀가 먹을 정도의 박수가 쏟아진다. 거기서 K씨는 의문을 가진다. 혹시 소크라테스가 무슨 말을 덧붙였는데 박수 소리에 묻혀, 이후 이천 년 동안 다음 말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 아닐까."(48p)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기억에서 지워지는 순간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존 버거는 사라지는 것들의 그 '사소한'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 대부분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유명인이 되기도 힘들고, 역사의 흐름을 바꿀 위대한 사람이 되기는 더욱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아름다움이 꺾이지는 않는다.


존 버거가 그린 벤투의 스케치북에는 평범하고 사소한 이웃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내의 요양비를 내기 위해 전 재산을 쏟아붓는 은퇴 정비기사의 웃음, 중세시대 익살꾼들의 고요한 눈동자, 지역 고교 교사가 자신의 50세 생일파티에서 추는 열정적인 춤, 오래전 캄보디아를 떠나 유럽에 자리 잡은 어느 화가의 그림. 이들의 사소한 이야기가 드로잉을 통해 하나로 이어지면서 더는 사소하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된다. 점과 점을 잇는 선이 면을 만드는 작지만 아름다운 기적이 펼쳐진다.

628x471.jpg 인간 신체는 외부 물체의 본성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변용된다- 윤리학 3부, 정리 12의 증명

그들의 사소한 이야기가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삶을 견뎌낸 그 자체가 아름답다. 존 버거는 종이가 셀 수 없이 많은 수정을 견뎌낼 때만이 하나의 드로잉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수정을 하려는 나의 노력과 그것을 견뎌낸 종이'가 마침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닮아가기 시작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드로잉이 수정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그것을 견뎌낸 종이가 아닐까. 모든 드로잉이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듯이 아무리 사소한 인생이라도 가치 없는 삶은 없다.


인간의 파괴적인 본성에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가끔은 인간 존재에 희망을 놓지 않게 되는 순간이 있다. 글로 표현하기 힘든 순간들인데, 존 버거의 글에서 딱 맞는 표현을 찾았다.

"사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손에 책 세권을 들고 있는 다른 할머니-나보다 나이가 적다-쪽을 돌아본다. 사람들이 책을 드는 방식은 특별해서, 다른 어떤 물건을 들 때와도 다르다. 움직이지 않는 물건이 아니라 마치 잠이 든 어떤 것처럼 든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들 때 같은 방식으로 드는 걸 종종 볼 수 있다."(89p)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이 연대에 대한 책일 수도 있겠다. 나는 연대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에 더 매료됐다. 이 독특한 책은 읽는 이마다 다른 것을 보고 다른 매력을 찾을 것 같다.


스피노자

1632년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렘브란트가 살았다. 영민했지만 랍비에게 존경심을 표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문당했다. 유대 사원은 스피노자에게 "율법에 적힌 모든 창공의 저주가 그에게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스피노자는 마흔넷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읽고 사색하고 토론했다. 스피노자는 생전에 자신의 책을 출판하기 거부했다. 존 버거는 "스피노자는 후대에 말을 건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 렌즈 세공을 했고, 드로잉도 했고, 자화상도 그렸다.


존 버거

1926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활동했다. 중년 이후에는 알프스 산록의 시골 마을에 들어가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 하고 있다.


메모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15p


박물관에서는 보통 떠오르지 않는 생각이 떠올랐다.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욕망이 또한 상호적이라면- 그 대상이 되는 이의 두려움을 없애 준다. 아래층 전시실에 있는 그 어떤 갑옷을 입는다고 해도, 그 정도로 완벽하게 보호받는 느낌은 가질 수 없다.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느낌 중 불멸의 느낌에 가장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33p


운명에 이름을 지어 줄 수 있을까. 운명에 종종 기하학 단위 같은 규칙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표현할 명사는 없다. 드로잉 한 점이 명사를 대신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확신이 없다. 루카에게 드로잉을 주었고, 다음날 그는 액자에 넣었다.

71p


만약 인간에게 있는 침묵할 수 있는 역량이 말할 수 있는 역량과 동등하다면, 분명히 인간의 삶은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다.

-<윤리학> 3부, 정리 2의 주석


이윤추구가들은 사물의 성질이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의 부정한 돈벌이에 비친 자신들의 인상에만 익숙하다. 그래서 편집증에 빠지고, 그 편집증에서 지치지 않는 에너지가 나온다. 그들이 신념처럼 반복하는 말은,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153p


내게는 플라토노프의 사진도 몇 장 있다. 그를 그리는 건 쉽다. 어릴 때 모습, 철도 일을 하던 모습, 기자일 때 모습, 아버지로서의 모습. 하지만 그 사진들은 그를 과거에 고정시켜 버린다. 내가 읽고, 깊이 생각해보는 그의 말들은 현재형이고 급박하다. 이제 그를 보고 싶다. 내 앞에 있는 테이블 위, 그의 이야기가 실린 책들 옆에 나란히 놓아 보고 싶다.

1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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