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번째 리뷰_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6년 만에 사표를 냈다. 첫 직장, 광화문 사거리에서 일한다는 자부심, 많은 좋은 사람들과 매달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월급들을 포기해야 했다. 사표에는 '일신상의 사유'라고 적었다. 의례히 그렇게 적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일신상의 사유 때문에 그만두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떠나고 싶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짧은 여행을 계획 중인 내게 회사 동기가 책 한 권을 줬다.
MBC 기자와 MBC 계열사 사장을 지낸 손관승 씨가 4주 동안 체코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을 여행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다. 그는 200년 전 괴테가 떠났던 길을 따랐다. 그는 괴테의 유명한 <이탈리아 기행> 첫 구절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새벽 3시, 아무도 모르게 칼스바트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괴테는 독일 연방의 바이마르 공국에서 10년이 넘게 행정업무를 맡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난 뒤에 그는 창조적 업무보다 궁중의 행정적 업무에 열중했다. 그 시간이 괴테를 괴롭게 만들었고, 그는 새벽 3시에 정신적 고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이탈리아로 떠났다.
나의 동기는 내게 이 책을 주며 '여행을 왜 떠나는가'를 고민하라고 말했다. 새로운 곳을 향하는 여행은 언제나 도전적이고 사람을 흥분하게 만들지만, 정작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몇 장의 사진들, 아름다운 풍경이 담긴 엽서들, 도시 이름이 박힌 텀블러. 이런 것들은 정작 중요한 것들을 담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사진기를 들고 베를린을 가도 보이지 않는 선은 찍을 수가 없다. 최고급 텀블러도 로마 골목길에 숨어 있는 카페의 커피 향을 담을 수는 없다.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행을 왜 떠나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나의 동기는 내 여행을 걱정해주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기억될만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나는 감히 괴테의 삶을 따라 할 수(그럴 생각)도 없고, 같은 직업을 가졌던 손관승보다도 한참이나 어리다. 그럼에도 나는 200년 전의 괴테, 그리고 2년 전의 손관승만큼이나 떠나야 한다는 열망, 떠날 수밖에 없다는 갈망이 심했다. 6년 동안 매일 같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면서 나는 나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가 거의 고갈됐다는 것을 느꼈다. 매일 아침 8시까지 출근해야 하는 삶, 주말에도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삶, 언제나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들은 서서히 내 안의 샘을 마르게 했다. 나는 비교적 성실하게 일들을 처리했고, 견실하다는 평가를 듣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성실한 삶의 바탕은 창조적 에너지라는 사실을. 창조적이지 않은 사람은 성실할 수도 없다. 묵묵히 소처럼 일하면서도 나는 머릿속으로는 언제나 우주와 개미를 꿈꿨다. 창조적 에너지가 고갈된 시점에서는 더 이상 성실하게 일할 수도 없었다. 이것이 내가 사표를 내고 여행을 결심한 이유다. 다시 성실하게 일하기 위해서라도 창조적 에너지를 채워야 했다. 재충전을 위한 가스 스테이션은 내가 동경해왔던 프라하와 베를린이다.
괴테는 남으로 향했다. 체코 칼스바트를 떠난 괴테는 오스트리아와 알프스를 지나 이탈리아 반도 구석구석을 누빈다. 손관승은 괴테의 이 여정을 '젤프스트 빌둥(Selbst Bildung)'이라고 표현한다. 독일어로 치열한 자기 학습과 자기 연마의 시간이라는 뜻이다. 괴테는 언제 어디서나 적고 그렸다. 10여 년의 궁중 생활로 사라진 창조적 에너지를 다시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행복하지 않았다. 뭔가 특별한 전환점이 필요했다. 오랜 궁중생활로 창조적 에너지가 고갈되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창조적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정신적 피곤이 심해져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인데, 괴테는 스스로 그 증상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 해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괴테는 길을 떠났다.(11p)
창조적 인간에게 가장 나쁜 독약은 매너리즘이다. 그는 매너리즘이라는 이름의 독약이 서서히 몸 안에 스며드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둥지를 박차고 나온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쿠데타였던 셈이다.(80p)
괴테가 택한 여행길은 많은 예술가들이 떠났던 길이기도 하다. 손관승은 그들의 이야기도 틈틈이 기록한다. 아카데미를 세 번이나 차지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로마로 숨어들었다. 그는 <전망 좋은 방>, <프라하의 봄> 같은 작품들로 이미 유명 배우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영예를 뒤로 하고 미켈란젤로 언덕 근처의 구두 공방에 들어간다. 그는 영화배우의 삶을 버리고 그곳에서 5년 동안 하루에 8시간씩 허름한 의자에 앉아 매일 같이 가죽을 자르고 신발 밑창을 꿰맸다. 그러고 나서 다시 돌아온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세 번이나 받은 유일한 배우로 거듭난다. 나는 디카프리오와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떠날 수 있는가.
인간의 본성은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떠나는 인간이 정답에 가장 가깝다고 느낀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떠나야 하는 운명을 갖고 있었다. 손관승이 말하는 유목민의 DNA 때문일 수도 있다. 게르만 민족의 후예인 괴테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유목민의 피가 짙었을 것이다. 그는 뛰어난 여행자였다. 1년 8개월 동안 이탈리아를, 그것도 19세기에 여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으리라. 그 스스로도 이탈리아 기행에서 여러 차례 여행의 고단함을 고백하기도 한다. 괴테가 뛰어난 여행자인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떠나야 할 때를 정확하게 알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가 고갈되기 직전에 여행을 떠나 로마에서 그 모든 에너지를 떠나기 이전보다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 귀환한다.
로마. 그 많은 광장들을 괴테는 빠짐없이 걸었고, 그 많은 선술집에서 날마다 와인을 취하도록 마셨다. 그는 로마에 취했다. 이탈리아 기행에서 괴테는 로마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만월의 달빛을 가득 받으며 로마를 두루 산책하는 멋에 대해서는 그것을 직접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저녁때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 절벽처럼 솟아오른 왕궁의 폐허 위에 섰다. 그런 광경에 대해서는 물론 어떠한 말로도 전달이 불가능하다. 대체로 로마에서는 자질구레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이제는 나의 로마 체류에 대해 적절히 설명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이 도시를 관찰하는 데 있어서 내 생각은 바다 멀리로 나가면 나갈수록 더욱더 깊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괴테는 시스티나 성당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는 동료 예술가들과 선술집에서 와인을 마시며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중에 누가 더 뛰어난 지를 놓고 언제나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들은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술집을 떠나 시스티나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열쇠를 가진 구두 수선공에서 약간의 돈을 쥐어주고 성당 안에 들어가 직접 그림들을 보며 다시 논쟁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런 삶에 창조적 에너지가 충만하지 않을 수가 없다. 괴테는 타고난 여행자이자 예술가였다.
밥 말리는 '어떤 사람들은 비를 느끼지만, 다른 이들은 그냥 젖기만 한다(some people feel the rain, others just get wet)'고 노래했다. 괴테는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로마는 오랜 역사와 고고한 예술들이 살아 숨 쉬는 곳이었고, 그는 그 모든 숨결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자기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면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손관승은 지나친 사회관계에서 오는 독, 이른바 사회독을 빼내기 위해서는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도 사회독에 지나치게 중독돼 있었다. 나의 여행은 사회독을 빼내고 그 자리에서 창조적 에너지를 채우는 계기가 될까. 여행을 하루하루 준비하며 챙겨야 할 것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새로운 걱정에 사로잡힌다. 이 모든 것들을 챙긴다면 서울에 남아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그럴 때마다 이 책을 떠올리며 여행의 목적, 내가 왜 떠나야 하는가를 되새기게 된다. 여행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 어떤 여행기를 남겨야 할 것인가. 아름다운 사진과 감동적인 예술작품들, 목구멍을 차갑게 만드는 체코의 생맥주. 이 모든 것들도 소중하게 챙겨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왜 떠나야 했는지를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게 써야 한다. 괴테가 에커만에게 했던 조언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당분간은 이른바 작은 대상만을 다루고, 자네에게 날마다 제시되는 모든 것을 언제나 그 즉시 마무리하기만 하게. 그러면 자네는 대개 항상 좋은 성과를 내게 될 거고 하루하루가 즐거울 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