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번째 리뷰_연애론
스탕달의 <연애론>은 실패한 사랑의 기록이다. 19세기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인 스탕달(본명 앙리 벨)은 제대로 된 연애를 단 한 차례도 해본 적이 없다. 사랑뿐 아니라 우정에서도 실패한 인생이었다. 그의 전기 작가들은 스탕달을 온전히 이해한 친구가 그의 곁에 아무도 없었으리라고 본다. 위키백과는 스탕달을 '연인으로도 실패했고, 군인으로도 실패했고, 작가라는 천직에서도 실패했다(스탕달은 생존 당시에는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묘사한다.
스탕달의 첫 번째 주요 저작인 연애론은 역시나 사랑의 실패에서 비롯됐다. 스탕달은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밀라노에서 지냈는데 그때 끔찍한 사랑의 실패를 경험했다. 밀라노 장군의 아내인 마틸드 뎀보스키를 사랑한 스탕달은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스탕달은 이탈리아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며 밀라노를 떠났고, 그의 사랑도 참담한 실패로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스탕달이 파리로 돌아와 쓴 책이 연애론이다. 스탕달은 이 책을 이데올로기의 책이라고 명명하고 있지만, 그 스스로도 고백하듯이 읽다보면 스탕달의 탄식이 눈에 보일 지경이다. 한 친구에게 스탕달을 읽는다고 했더니 "찌질한 작가는 싫다"는 대답이 돌아왔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럼에도 연애론을 읽다 보면 사랑의 실체에 어느 정도 다가섰다는 느낌이 든다. 사랑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종종 사랑을 알 것 같다는 이유 없는 확신이 마음 속에 가득찰 때가 있다. 스탕달의 연애론을 읽을 때도 그 중 하나다.
사랑에 대한 스탕달의 이론은 조금 특이하다. 이른바 '결정작용'이 그의 연애론의 핵심이다. 결정작용은 사랑하는 대상을 이상화하는 과정이다. 스탕달의 설명을 들어보자.
"잘츠부르크의 소금 광산에서 사람들은 버려진 갱 밑바닥에 겨울에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를 던져 넣는다. 두세 달 후에 꺼내 보면 그것들은 반짝이는 결정들로 뒤덮여 있다. 박새 다리보다 굵지 않은 조그만 나뭇가지도 움직이고 반짝이는 무수한 다이아몬드들로 뒤덮인다. 거기에서 더 이상 애초의 나뭇가지를 알아보기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결정(結晶)’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은 새로운 완전성들을 획득한다는 발견을 눈앞에 제시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정신의 작용이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을 우상화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행동과 말, 생김새에서 사랑을 이끌어낸다. 이른바 미점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스탕달은 이런 사랑의 과정을 철학적으로 묘사하고 서술한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그의 마음에 구체화된 사랑의 형상에 공감이 간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할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가까운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니까.
스탕달은 사랑의 쾌락이 불안과 정비례한다고 지적한다. 권태로운 사랑, 권태로운 삶에서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 평생 실패와 함께 불안에 떨었던 스탕달만이 할 수 있는 관찰과 묘사가 아닐까 싶다. 아마 이런 관찰 덕분에 소설 사상 가장 매력적인 남자주인공이라고 하는 <적과 흑>의 쥘리엥이 탄생했을 것 같다. 연애론은 19세기 유럽 사교계를 다루기에 21세기 한국 독자들에게는 불친절한 책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잠언집으로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랑에 대한 수많은 책들, 사랑을 가르치려는 책들이 서점마다 적지 않지만 이만한 책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연애의 정열에 있어서는, 다른 많은 정열과는 반대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추억은 장차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언제나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11p
사랑이 싹트기 위해서는 극히 작은 희망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희망은 2~3일 내로 없어질지 모르지만, 사랑이 싹튼 데는 변함이 없다.
16p
놀라움과 희망은 열여섯 살만 되면 느끼는 사랑의 욕구와 우수에 의해 크게 조장된다. 이 나이 때 느끼는 불안은 사랑의 갈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갈증은 우연히 제공된 음료수의 맛에는 그다지 까다롭지 않기 때문이다.
19p
진정한 아름다움을 형성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약속하는 것은-그가실제로 그런 얼굴을 보았다고 가정하고 하는 말이지만-이를테면 한 단위로 나타낼 수 있는 행복량이라고 치자. 그러면 그 애인의 얼굴은 있는 그대로도 천 단위의 행복량을 약속하는 것이다.
30p
사랑을 하는 순간부터 가장 현명한 남자도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자기의 장점을 과소평가하고 사랑하는 여자의 사소한 호의도 과대평가한다. 그리하여 불안과 희망이 일종의 소설적인 요소를 띠게 된다.
33p
교회에서 서너 마디의 라틴어를 들은 후에, 그때까지 두 번 밖에 만난 일이 없는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것은, 2년 동안 사랑한 남자에게 본의는 아니지만 몸을 맡기는 일보다 분명히 부끄러운 일이다.
현대의 결혼에서 일어나는 죄와 불행의 원인은 P(로마가톨릭)이다. 그것은 결혼 전의 처녀에게서는 자유를 빼앗고, 그녀가 선택을 그르친 후에는 이혼을 금하고 있다.
49p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쓰고 남이 쓴 것을 부정한다. 나는 책을 복권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사실상 책은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것이다. 후에 어떤 책은 잊어버리고 어떤 책은 재판함으로써 복권 당첨자를 발표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힘껏 그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써 나갈 수밖에 없으므로, 남을 비웃을 권리는 없을 것이다.
55p
사랑을 하는 남자들의 말에는 으레 혼란이 따르므로, 이야기의 일부에서 성급하게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은 현명치 못한 일이다. 그들은 뜻하지 않은 우연적인 말로만 자기감정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마음의 울부짖음이다.
60p
정말로 감동받은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매력 있는 말을 하게 마련이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말을 떠벌리곤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허세를 부리는 남자는 불행하다. 그런 남자는 진심으로 사랑을 하고 있을 때에도 온갖 재치를 다 부린다 하더라도 그 행복을 3/4을 잃어버린다. 한순간이라도 허세에 사로잡히면 일 분 후에는 싱겁게 여겨진다.
93p
언제나 해소시켜야 하는 사소한 의혹이 있으면, 이것이 갈망을 일으켜 행복한 사랑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의혹이 사라지지 않으므로 그 쾌락은 결코 권태롭지 않다. 이 행복의 특징은 매우 진지하다는 것이다.
98p
공기처럼 가벼운 일도
질투하는 자에게는 성경의 말씀만큼이나 훌륭한 증거가 된다.
<오델로> 제3막
오기가 개가를 올리는 것은 취미의 사랑에 있어서이다. 이런 사랑에서는 오기가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취미의 사랑을 정열적인 사랑과 구별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오기는 연애결혼 다음으로 행복한 결혼을 얽어매는 사슬이 된다.
117p
사랑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친구가 애인과 떨어져 있는 것을 이용하려면, 언제나 친구가 옆에 있어서 사랑의 경위를 충분히 반성케 하여 그 과장됨과 무의미함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정말 평범한 일처럼 생각된다.
126p
여자는 그 애인에게 벌로서 줄 수 있는 불행의 정도에 의해 비로소 권위를 갖는다. 그런데 남자에게 허영심밖에 없을 경우에 여자는 유용하기는 하지만 필요하지는 않다.
132p
프랑스 사람으로서 무엇에 감탄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부자연스런 것은 없다. 왜냐하면 감탄하고 있는 것에 비해 자기가 한결 열등하다는 것을 나타낼뿐더러(이것까지는 무방하다고 치자), 만일 누가 그 감탄하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면 그 사람보다도 못하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대하여 中, 136p
스페인은 또 다른 비교에 유용하다. 즉 나폴레옹에게 저항할 수 있었던 이 유일한 주민은 어리석은 명예심에 따르는 비열함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훌륭한 군기를 만들거나, 반년마다 제복을 바꾸거나, 또는 커다란 박차를 달지는 않지만 그 대신 'no importa(괜찮아)' 장군을 갖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에 대하여 中, 151p
미국인들은 모든 생활을 합리화하여 위험을 미리 막는 데 주력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많은 노력과 심려 끝에 마침내 과실을 딸 때가 되면, 그것을 즐기기에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게 된다. 이 윌리엄 펜(펜실베이니아의 정치가)의 자손은 그들의 생활을 묘사한 것 같은 다음의 시를 읽은 적이 없을 것이다.
'살기 위해 사는 보람을 잃는다'
미국에 대한 나의 추측에 부채질을 하는 것은 예술가와 작가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아직 우리에게 1막짜리 비극도 한 장의 그림도 그리고 한 권의 워싱턴 전기도 보내오지 않는다.
미국에 대하여 中, 166p
"사랑의 즐거움은 사랑하는 데 있다. 사람은 상대방에게 일으키는 정열보다 자기 자신이 느끼는 정열에 의해 더욱 행복한 것이다."
로슈프코 <잠언집>
신중한 남자는 언제나 의심을 품는다
사랑을 감추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여자 쪽에서도
한평생 실수를 범하지 않는 듯한 남자에게는
언제나 한숨만 쉬게 내버려 둔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녀가 주는 보물의 가치는
맛본 자가 아니면 모른다
그것은 값질수록 고귀하다
사랑의 행복은 노고의 대가이다
-니베르네 <즉흥시인 기욤 드 라 트르>
사랑의 쾌락은 언제나 불안과 정비례한다. 호색의 불행은 권태이다. 정열적인 사랑의 불행은 절망과 죽음이다. 사랑의 절망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하여 화젯거리가 된다. 파리에 우글거리고 있는 권태로운 늙은 방탕자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권태로 자살하는 사람보다 사랑으로 자살하는 남자가 많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권태는 모든 것을, 자살할 용기까지도 빼앗는다.
22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