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번째 리뷰_소설의 이론
소설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들이 한없는 고민의 시간을 가지는 것처럼 독자들도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할 지에 대한 가이드는 많지만,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 지에 대한 가이드는 찾기 어렵다. 소설을 다루는 팟캐스트나 리뷰는 많지만,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줄거리 요약, 개인적인 감상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새문사가 1989년에 펴낸 <소설의 이론>은 어떻게 소설을 읽어야 할 지에 대한 입문서로 제격이다. 이 오래된 책은 우연하게 내 손에 들어왔다. 친구에게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빌리기로 했는데, 그 친구가 제목만 듣고 이 오래된 책을 가져온 것이다. 그 친구는 이 책을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샀다고 하는데, 먼 길을 돌아 돌아 내 책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예상치 못한 책이었지만, 한 장 한 장 읽으면서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더 나아가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힌트들을 얻을 수 있었다. 책은 로버트 스탠탠이 쓴 '제1부 : 소설의 이해', 이앤 와트가 쓴 '제2부 : 리얼리즘과 소설 형식', 웨인 C.부드가 쓴 '소설에서의 사실감'으로 이뤄져 있다. 편역은 전남대의 박덕은 교수가 맡았다.
1부에서는 우리가 소설이라고 부르는 문학 장르에 대해 개괄적으로 탐구한다. 저자는 '순수 소설'과 '통속 소설'로 소설을 크게 구분한다. 통속 소설도 나름의 존재 가치가 있지만, 순수 소설처럼 시대가 지나서도 계속해서 읽히지는 않는다. 우리가 순수 소설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0년 이상 지난 대부분의 통속 소설들이 오늘날에는 기이하고 어렵게 여겨진다. (마치, 우리 시대의 통속 소설이 40년이 지난 후 그렇게 여겨질 것처럼.) 왜냐하면, 그 통속소설은 이제는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인물의 유형과 상황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훌륭한 순수 소설이란 항상 신선한 것이다. 왜냐하면, 순수 소설이 독자들에게 익숙해지도록 요구하는 모든 것은 일상적인 인간의 경험과 언어 그 자체만이기 때문이다.
8p
소설은 인생에 관한 것이며, 인생은 모든 것 중 가장 흥미로운 경기이며, 그리고 훌륭한 소설을 읽는 것은 명승부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과 같다. 그러한 것은 선수들이 규칙을 간단하게 해 버리거나 무시해 버리는 경기(즉, 통속 소설)을 즐기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읽기 쉽게 하기 위해, 통속 소설은 인생의 무한한 다양성을 반영하는 대신에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등장 인물, 상황, 그리고 주제로 그 자체를 국한해야 하는 것이다.
21p
통속 소설에 나오는 인물은 그 상황에서만 유효한 경우가 많다. 반면 순수 소설 속 인물들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공감을 자아낸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알렉세이와 드미트리의 말과 행동은 지금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드미트리의 열정과 이반의 고뇌는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 편의 소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등장 인물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연구가 필요하다. 한 명 한 명의 등장 인물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좋은 소설에서는 심지어 자신들을 창조한 소설가마저도 등장 인물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프랭크 오코너는 "나는 지적인 것에 비해 본능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로서 나는 내가 올바르게 만들어내려고 애썼던 어떤 이야기가 제멋대로 하려고 하고 나더러는 꺼져 버리라고 말할 때에 느끼는 감정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바우언은 "등장 인물은 이미 존재해 있다. 그들은 발견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저자는 인물의 말과 행동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소설을 읽게 된다고 경고한다. 한 편의 소설을 다 읽고 난 이후에 줄거리만이 머릿속에 남는다면 등장 인물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말과 행동이 어떻게 성격을 나타내는가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것들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에는, 우리가 그것을 아는 정도는, 버스 속에서 우리의 귓전으로 들려오는 낯선 사람들의 대화를 얻어듣는 것 정도밖에 안 된다. 우리는 등장 인물을 '알게 됨'을 통해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며,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등장 인물을 이해한다."(34p)
이 책은 소설을 읽는 방법을 알려주는 동시에 소설을 쓰는 방법도 가르친다. 소설을 제대로 읽는 것과 제대로 쓰는 것은 결국 같은 출발선에서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2부와 3부에서 주로 다루는 주제는 리얼리즘, 무엇이 소설을 사실처럼 느껴지게 하느냐다. 특히나 작가의 존재에 대한 지적이 계속해서 나온다.
작가가 존재하고 있지도 않다는 느낌을 독자에게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잠시 동안이라도 작가가 등장 인물들의 삶을 조정하면서 장면 뒤에 있지 않나 하고 의심하게 된다면, 등장 인물은 자유롭게 보이지 못할 것이다.(154p)
상대성이론이 소설의 세계에 완전히 적용된다는 사실, 아인슈타인의 세계에서처럼 실제 소설 속에서도 특권을 갖는 관찰자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15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