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자의 서구 미술작품 감상법

44번째 리뷰_다른 방식으로 보기

by 이기자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9p)

'본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권력관계를 드러낸다. 본다는 말에는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의 구분이 포함돼 있다. a가 b를 본다는 것은 a의 시선에 따라 b의 겉모습과 행위가 재단된다는 뜻이다.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는 이 본다는 행위의 폭력성을 지각한 선구자 중 한 명이다. 존 버거는 1972년 BBC 텔레비전 시리즈 강의에서 시각예술에 대한 새로운 감상법을 제시했다. 기존의 미술사가들이 제시한 미술작품 단일한 미술작품 감상법(way of seeing) 대신 다양한 방식의 감상법(ways of seeing)이 가능하다고 선언한 것이다.


존 버거가 주목한 것은 기존의 미술사가들이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던 부분, 혹은 다루기를 꺼렸던 부분들이다. 존 버거는 미술작품 속 여성(gender)과 인종, 계급 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뤘고 기존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동시에 유화와 현대 광고 사이의 유사성을 폭로하면서 미술작품을 경제적인 차원에서 다룬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는 방송 직후 책으로 출판됐다. 초판이 나온 지 44년이 지났지만 책이 다루는 내용들은 너무나도 현대적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여성이 나오는 누드화에 대한 분석, 그리고 유화와 광고의 유사성에 대한 분석이다.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을 직접 봐야 한다. 존 버거의 설명에 이어지는 그림들을 직접 보다 보면 그의 논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몇 줄로 그의 논지를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56p)


왜 유럽의 미술작품에는 여성의 누드화가 많을까. 누드화에 등장하는 여자의 태도는 어째서 수동적인가. 존 버거는 여성이 등장하는 누드화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 묻는다. 그 주인공은 누드화 속 여자와 누드화 자체를 소유한 남성이다. 한 편의 정형화된 누드화는 그 그림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각까지 포함하고 있다. 존 버거는 피터 넬리가 그린 누드화 '넬 그윈'을 들어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 작품은 왕의 정부들 가운데 하나인 넬 그윈의 초상화다. 그녀는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응시하는 관객을 수동적으로 쳐다본다. 하지만 벌거벗은 몸은 그윈 본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소유한 사람(즉 여인과 그림 둘 다를 소유한 사람)의 감정 혹은 요구에 복종한다는 표시인 것이다. 왕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줄 때, 왕은 이를 여인의 복종의 증거로서 자랑하고, 그 그림을 보는 손님들은 왕을 부러워하게 된다.(62p)


벌거벗은(naked)와 누드(nude)는 엄연히 다른 상태다. 벌거벗은 몸은 자연스러운 상태 그 자체이지만, 누드는 보이기 위한 상태일 뿐이다. 존 버거는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라고 지적한다. 누드화는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한 관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존 버거는 여성에 대한 남성적 응시와 그 폭력성을 지각한 거의 첫 번째 미술평론가라고 할 수 있다.

Turutat - Uzanmış Bakkante.jpg 펠릭스 트루타의 <누어 있는 바쿠스 여신>

이 책이 현대적이라는 것은 중세 누드화에서 발견되는 남성적 응시의 폭력성이 광고를 비롯한 현대 미디어에서 그대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페테르 루벤스가 그린 <파리스의 심판>은 파리스가 여러 명의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사과를 상으로 주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른바 판정이라는 요소가 누드화에 가미된 것이다. 존 버거는 이 그림 속 장면이 고스란히 현대의 미인 선발대회로 이어졌다고 본다. 더 나아가면 아이돌 그룹 멤버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들(특히나 프로듀스101)도 존 버거의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각이 중세 이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미술작품의 한 형태인 '유화'에 대한 분석도 날카롭다. 존 버거는 15세기 등장한 유화에 대해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라고 요약한다.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가 유화의 시대를 뒷받침했다는 것이다. 피렌체와 베니스에서 번성한 미술작품들, 미술작품을 거래하는 공개시장의 등장은 하나의 설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었기 때문에 모두 서로 교환 가능하게 됐다.'


존 버거는 전통적인 유화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한다. 이는 대부분의 유화 작품들이 단순히 판매되기 위해 그려졌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에 점점 더 숫자가 늘어나는 보통 수준의 평범한 유화 작품들은 냉소적인 태도로 제작된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런 작품들이 표현하는 명목상의 가치가 화가 본인에게는 별 다른 의미가 없었다. 화가 본인에게는 주문받은 그림을 완성하는 일 또는 그림을 파는 일이 더 중요했다. 진부한 작품은 서투름이나 무지함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장의 요구가 예술 자체의 요구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유화 시대는 미술품을 거래하는 공개시장이 등장한 시기와 일치한다.(103p)


이 와중에도 렘브란트나 고야, 터너 같은 예외적인 예술가들이 있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예술사가들은 이 예외적인 예술가들을 오히려 전통의 계승자로 만들어버린다. 전통의 규범을 깼던 이들이 오히려 전통적인 예술의 대가로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존 버거는 우리가 미술관에서 겪는 혼란의 원인을 여기서 찾는다. 우리는 미술관을 찾을 때마다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맞닥뜨렸을 때 나오는 당연한 반응이다. 우리가 미술관의 작품들을 이해할 수 없는 단순히 우리의 무지 때문만이 아니라 실제로 미술관의 작품 전시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존 버거는 "미술사는 유럽의 회화 전통 속에서 탁월한 작품과 평범한 작품을 구분하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그 결과 혼란은 미술관의 전시 벽면에 그대로 드러난다. 흔히 수많은 삼류 작품들이 탁월한 작품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해명은 고사하고- 무엇이 그 둘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 주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berger2.jpg 부커상을 받은 소설가이자 미술비평가이자 화가인 존 버거.

유화는 광고로 이어진다. 유화와 광고는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소유를 찬양한다는 점에서 크게 보아 하나의 틀로 묶을 수 있다. 존 버거는 "광고가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시각예술을 대신한다는 생각을 잘못이다. 그 시각예술이 마지막으로 소멸해 가는 형태가 광고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유화의 특성을 계승한 광고에 대한 존 버거의 해부로 마무리된다. 사실 유명한 미술작품이 광고에 그대로 쓰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미술작품을 모방한 광고는 더욱 많다. 이런 점에서 보면 미술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분석이 광고로 이어지는 흐름은 자연스럽다. 당연히 광고 이미지에 대해 존 버거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광고에 대한 존 버거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부분을 발췌했다.


광고에서는 한 제조회사나 상사의 상표가 다른 회사의 상표와 서로 경쟁한다. 그러나 모든 광고가 서로 다른 광고 내용을 더 믿음직스럽게 만들고 효과 있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언어로서 언제나 다 함께 공통된 제안을 하고 있다. 광고의 내용을 보면 이 화장품과 저 화장품, 저 자동차와 이 자동차 중에서 고를 수는 있으나 한 시스템으로서의 광고 자체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채 오직 한 가지 제안밖에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무엇인가를 더 사들임으로써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생활이 변하게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152p)


광고는 한 여인으로 하여금 그녀가 그 상품을 구입하면 자신이 선망의 대상이 -그녀를 아름답다고 여겨주는 다른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광고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 자신에 대한 애정을 슬쩍 훔쳐내어선 광고 상품의 구입 대가로 그 애정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다.(155p)


광고에 대해 비교적 영향을 덜 받는 사람들은 갑부들뿐이다. 그들의 돈은 써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수중에 그대로 간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광고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에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돈이 전부이고, 돈을 벌어야 불안감이 사라진다.(166p)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무엇을 먹을까, 무슨 옷을 입을까, 무슨 차를 탈까 하는 선택은 의미 있는 정치적 선택을 대치하고 있다. 광고는 사회 내부의 비민주적인 모든 것들을 은폐하거나 보상해 주는 일을 돕는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또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은폐해 준다.(173p)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권력, 계급 같은 문제들로 귀결된다. 본다는 것은 곧 권력관계의 반영이다. 다른 방식으로 보자는 선언은 기존의 권력관계를 전복하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고 존 버거가 제안하는 새로운 감상법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동안 우리가 당연시해왔던 오래된 감상법에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2012년에 한국어로 번역된 이 책에 존 버거는 짧은 인사말을 보내왔다.


나는 여러분들께 위대한 일본 시인 고바야시 잇사가 두 세기 전에 쓴 하이쿠 한 편을 보냅니다. 그는 단 열한 단어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부자들을 위해

새 눈에 대해 너절한 글을 쓰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계속 싸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존 버거에 관해 https://ko.wikipedia.org/wiki/%EC%A1%B4_%EB%B2%84%EA%B1%B0


매거진의 이전글소설을 읽기 위한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