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무게를 짊어진 이들

45번째 리뷰_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이기자

그러나 묵직함이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 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었다. 비엔나에서 프라하로 가는 열차 안이었다. 장소가 주는 의미가 남다르기에 전보다 더 집중해서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테레자를 만나기 위해 망명지를 떠나 프라하로 돌아가는 토마시에 감정이입을 해보려 했으나, 잘 되지는 않았다. 토마시는 체코 국경을 넘자마자 소련의 탱크를 만났다고 했다. 내가 탄 열차는 국경을 앞두고 잠시 속도를 줄이기는 했으나 어디에도 탱크는 없었다. 아니, 프라하를 앞두고 탱크를 보기는 했다. 프라하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역 근처 낡은 공장 마당에 탱크가 줄지어 서 있었다. 넉넉잡아도 서른 대는 넘어 보이는 탱크가 마당에 서 있었다. 눈이 내려서 인지 탱크 위에 비닐을 덮어놨다. 흡사 중고차 전시장의 흉물스러운 풍경 같기도 했다.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탱크의 잔인한 생명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탱크는 갈 길을 잃은 채 방황하는 사람처럼 포신을 어디에 둘 지 몰라했다. 토마시가 마주한 풍경과 내가 마주한 풍경은 소설과 현실이라는 차이를 넘어 그렇게 큰 간극이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은유로 가득 찬 소설이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밀란 쿤데라가 직접 이야기했듯이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토마시와 테레자, 사비나와 프란츠의 사랑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소설 속의 은유가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많은 사람이 이 소설을 이야기할 때 중산모자를 떠올린다. 중산모자는 단순히 성적 유희의 도구가 아니다. 사비나가 아버지에게서 유일하게 물려받은 유산인 중산모자는 '지나간 시간의 유적'을 상징한다. 중산모자에는 사비나의 개인사가 담겨 있다. 여기에 토마시의 시간이 더해진다. 토마시와 사비나가 스위스에서 재회했을 때, 그들은 중산모자를 보고 감격했다. 망명지의 생활은 모든 것이 지워지는 것과 같다. 프라하, 체코에서의 생활과 습관이 하나씩 지워지는 가운데 그들은 중산모자를 통해 그 지워진 부분을 다시 채울 수 있게 됐다.


중산모자는 우습게 보이거나 선정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지나간 시간의 유적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에 감격했다. 그들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정사를 나누었다. 거기에는 음란한 놀이가 기어들 틈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만남은 매번 새로운 어떤 음탕한 짓을 상상했던 에로틱한 게임의 연장이 아니라 시간의 회복, 함께 보낸 과거를 기리는 노래, 저 멀리 사라져 버린 비감각적인 역사의 감각적 회복이었기 때문이다.(150p)

토마시와 테레자가 머물렀을 프라하의 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가벼움. 그리고 가벼움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무거움. 가벼움과 무거움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은유인 동시에 밀란 쿤데라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하다. 체코의 역사는 무거움 그 자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체코인들은 좌절과 죽음을 항상 곁에 둘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물러난 다음에는 스탈린이 왔다. 나치와 소련의 통치는 체코를 병들게 했다. 토마시와 테레자, 사비나가 나고 자란 체코, 프라하는 그렇게 병들고 아픈 곳이었다. 그들에게 역사는 온몸을 짓누르는 무거움인 동시에 잊혀야 할 가벼움이었다.


사비나는 보헤미아의 공동묘지를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고 고백한다. 훗날 사비나는 공동묘지의 이미지에 대한 의견을 바꾸지만, 그녀에게 보헤미아의 공동묘지는 죽음보다는 자유의 상징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죽음과 자유는 사실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다르지 않다.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채 살아온 프라하의 연인들에게 죽음은 어찌 보면 자유를 향한 해방구였을 수도 있다.


프라하를 방문했을 때 움베르토 에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프라하 유대인 지구의 공동묘지를 찾았다. 묘지에는 1만2000여개의 비석이 있는데, 공간이 부족해 하나의 비석 아래에 7~8명의 유대인이 묻혀 있다고 한다. 회색 시멘트 벽으로 둘러싸인 이 작은 묘지는 홀로코스트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어찌 됐건 에코는 이 묘지의 이미지에서 <프라하의 묘지>라는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사비나가 자주 거닐었던 보헤미아의 공동묘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겠지만, 유대인 묘지는 죽음과 자유에 대한 고민을 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곳이었다. 이 묘지에 묻힌 이들은 그 좁은 땅에 여러 구의 시체가 겹겹이 묻혀 있는 것이다. 아마도 서로가 서로를 모를 이 시체들은 그 하중을 온전히 견뎌내며 영겁의 시간을 버텨 내고 있는 셈이다.

주말 아침 프라하의 유대인 공동묘지는 회색 담장과 철문에 둘러 싸인 채 외부 세계와 단절돼 있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토마시는 언제나 가벼운 사랑을 추구했지만 결국 테레자의 존재를 떨쳐내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 둘은 서로의 무게를 서로가 견뎌내야만 하는 관계가 된다. 어느 한쪽도 서로를 떠날 수 없다. 그 둘은 서로 불가능하게 기울어져 있는 기둥 같아서 어느 한쪽이 발을 빼면 양쪽이 모두 무너지게 된다. 가벼움을 찬양하던 토마시는 이제 시골 마을에서 트럭을 운전하며 자신에게 부과되는 짐의 무게를 온전히 견뎌낼 각오가 됐다. 테레자는 그런 토마시를 보며 비로소 자신이 토마시에게 내맡긴 짐의 무게를 깨닫는다. 둘에게서 자유로워진 사비나는 모순되게도 그 둘의 무게를 그리워한다.


무게에 대한 갈망은 곧 추락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진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추락에 대해 가장 적절하게 설명한 책이기도 하다. 추락은 가벼움과 무거움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추락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로 인한 죽음보다도 자신의 삶의 무게를 알게 된다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닐까.


끊임없이 '신분 상승'을 원하는 자는 어느 날엔가 느낄 현기증을 감수해야만 한다. 현기증이란 무엇인가? 추락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튼튼한 난간을 갖춘 전망대에서 우리는 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까?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10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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