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번째 리뷰_에로스의 종말
"사랑하면 닮는다."
사랑의 비극이 이 짧은 문장에 담겨 있다. (사랑에 빠진) 나와 네가 닮아가는 순간, 사랑은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타자에 대한 환상이 철폐되는 순간 사랑은 끝난다. 편안한 사랑, 안락한 사랑 같은 말들이 위험한 이유다.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너무나 따뜻한 말이지만, 사랑의 본질을 왜곡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 세이렌의 노랫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이 어떻게 메말라 가는지 보여준다. 한병철은 사랑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두 개인 사이의 가벼운 계약 관계가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경험"으로 정의한다. 사랑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타자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타자성을 부정한다.
우리 사회의 지배원리인 자본주의는 세계를 동일하고 균질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통일된다. 돈은 본질적인 차이를 지우고 모든 것을 평준화한다. 한병철은 이런 사회를 '동일성의 지옥'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돈은 새로운 경계를 배제하고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인식은 이 책의 서문을 쓴 알랭 바디우도 똑같이 공유한다. 바디우는 <사랑예찬>에서 타자성을 언급한다. 사랑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둘의 지속'이 필요하다. 사랑은 사실 둘의 만남이라는 극적인 사건에서 파생된 부차적인 감정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만남이다. 만남을 통해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중요하다. 아담과 이브가 서로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최초의 다수인 '둘'. 둘의 만남을 유지해나가기 위해서는 타자성을 이해하고 지켜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세계에서는 이런 타자성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세계를 동일성의 지옥으로 몰아가는 동시에, 사랑의 주체들을 나르시시즘의 함정에 빠뜨린다. 한병철은 자본주의를 종교로 보는 시각에 반대한다. 그는 "자본주의가 종교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죄(채무)와 죄사함(채무 면제)의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죄를 만들기만 할 뿐이다. 자본주의에는 속죄의 가능성, 채무자를 채무에서 해방시켜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은 성과 주체를 우울증에 빠뜨리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이 우울증은 주체를 망가뜨린다. 우울증에 빠진 주체는 자신의 에고(ego)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주체에게 진정한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안락한 사랑, 편안한 사랑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 돈이 모든 것을 평준화한 시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에 도전할 용기도, 힘도 낼 수가 없다. 사랑은 도피처가 된다. 나중에는 사랑마저 돈으로 해결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지하철에 넘쳐나는 결혼정보회사들의 광고들은 표피에 불과하다.
<에로스의 종말>은 단순한 사랑 타령이 아니다. 사랑이 없는 시대에는 예술도 없고, 우리의 정신도 말라간다. 바디우가 사랑을 재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한병철이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책을 읽다 보니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는 뉴스가 나온다. 로봇은 인간의 사고영역을 하나씩 점령해가고 있다. 퀴즈와 체스는 이미 인공지능의 영역이 됐고, 바둑도 몇 년 안에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사랑은, 마지막 보루다. 인간이 로봇이나 인공지능에게서 지켜내야 할 인간 존재의 마지막 땅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그 땅을 스스로 버리고 있다.
"경제만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문학의 위기도 겪고 있습니다. 유럽 문학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유럽에서 경험하는 것은 정신의 위기입니다. 지난 십 년 혹은 이십 년 동안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책은 홍수처럼 출간되지만 정신은 정지 상태입니다. 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위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 미셸 뷔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