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번째 리뷰_왜 베토벤인가
베토벤은 공기와도 같은 존재여서 사실은 베토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공기는 24시간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막상 공기의 화학적 조성을 대라고 하면 말문부터 막히기 마련이다. 베토벤도 마찬가지다. 베토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베토벤이 결혼을 했는지, 베토벤의 마지막 곡이 무엇인지, 베토벤이 어디서 죽었는지 이런 것들을 물어보면 대답할 수가 없게 된다. 잘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될 때가 더 흥미로운 법이다.
이덕희의 <왜 베토벤인가>가 딱 그랬다. 베토벤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채워가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불멸의 여인'의 존재를 파헤치는 과정이었다.
베토벤은 수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베토벤이 죽고 나서 사생아와 관련된 소송만 열네 건이 있었다고 하니 그 정력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베토벤은 평생 결혼 생활은 꿈꾸지 않았는데,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다. 바로 불멸의 여인이다.
베토벤이 죽고 나서 발견된 그의 유품 중에는 불멸의 여인(Unsterbliche Geliebte)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다. 날짜와 주소가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은 편지였다. 베토벤의 전기작가들은 편지의 주인공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후보만 해도 여덟 명이 넘었다고 한다. 베토벤은 그의 가곡 등을 불멸의 여인에게 받치기도 했으니 그 존재를 찾아내는 것은 음악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나의 천사, 나의 모든 것, 바로 나 자신이여-오늘은 단 몇 마디, 그것도 연필로(당신의 것인) 몇 자 적는다오-내일까지는 내 거처가 확실히 결정되지 않을 것이오-이 무슨 시간의 낭비겠소-필연이 명할 때 도대체 이 깊은 슬픔은 무엇 때문일까요!(중략) 우리는 쉬이 다시 만날 것이오. 더욱이나 오늘은 지난 며칠 동안 나 자신의 삶에 관해서 내가 심사숙고한 것을 당신과 더불어 얘기할 수 없다니-만약에 우리들의 마음이 언제나 서로 밀착돼 있다면 이런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도 않으련만, 내 가슴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아 터질 것 같소. 아아, 이따금 내겐 말이란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오.
-베토벤 편지 中
읽기에 따라서 감동적인 사랑의 편지일 수도 있고, 닭살 돋는 멘트의 남발일 수도 있다. 편지가 공개된 당시에도 이런 반응이 많았던 것 같다. 독설가로 알려진 조지 버나드 쇼의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나 역시 베토벤처럼 사랑에 빠져 백치 같은 연애편지를 썼지만, 많은 부분은 유감히도 돌려받지 못했다. 아마도 나의 사후 내 작품 속에 넣기 위해 사람들은 그것들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중략)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내가 쓴 연서들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그리고 그 내용을 나보다 더 잘 잊어버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좌우간 베토벤의 것보다 더 얼빠진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최악의 경우에도 이 위인이 설정한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 연구자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불멸의 여인이 누구인지 밝혀냈다. 베토벤의 친구이기도 한 프란츠 브렌타노의 부인인 안토니 브렌타노다. 베토벤은 <디아벨리의 왈츠에 의한 변주곡, 작품 120>을 안토니에게 헌정했고, 안토니의 열 살 난 딸 막시밀리아네에게 피아노 트리오를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자신의 친구의 아내를 차지할 수 없었다. 불멸의 여인은 베토벤의 마지막 연애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베토벤은 안토니와의 관계를 끝내면서 자신의 삶에서 결혼과 연애라는 특정 부분을 도려낸 것이다. 베토벤의 <일기> 첫머리는 그의 생각을 잘 대변해준다.
"너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니다. 앞으로는 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베토벤의 가족을 설명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베토벤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술주정뱅이였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책은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묘사한다. 베토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콜로뉴의 궁정 음악가였다. 하지만 그 차이는 극심했다. 할아버지는 13년간 궁정악장으로 활동하며 본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아버지는 범용한 재능의 테너에 그쳤던 것이다. 이 때문에 베토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에 자신을 투사했다고 한다. 베토벤이 <오디세이>를 즐겨 읽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흥미롭다. 베토벤이 오디세이에서 밑줄을 그어놓은 부분이다.
나의 어머니는 그가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 자신은 그걸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어떤 남자도 누가 자기를 낳아주었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텔레마쿠스가 아테나 여신에게 말한 것)
아버지를 닮은 아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훨씬 더 나쁘고
극소수는 그들의 아버지를 능가한다.
베토벤은 무능한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에게 출생의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남몰래 상상하지 않았을까. 오디세이를 읽으며 자신을 신화의 주인공과 동일시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베토벤은 자신이 프러시아 국왕의 서자라는 잘못된 기사가 나왔음에도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의 친구와 지인들이 강경하게 나무라는데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이덕희는 이를 베토벤의 '패밀리 로맨스'라고 설명한다.
어찌 보면 이런 태도가 그의 3번 교향곡 <영웅>에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베토벤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교향곡 5번이나 9번이 아닌 3번을 꼽았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의 존재를 영웅과 동일시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이 반영된 게 아닐까.
다른 교향곡도 베토벤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운명> 교향곡은 그야말로 베토벤의 삶 그 자체였다. "운명은 도전해야 할 적이요, 인생의 의의는 고통을 무릅쓰고 달성한 성취감에 있다"고 믿었던 베토벤은 <운명> 교향곡을 쓰면서 최고의 성취감은 오히려 고통을 통해서 획득된다는 것을 터득하게 됐다. 고통은 삶의 필요조건으로서 뿐 아니라 광명을 비춰주는 힘으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베토벤은 평생 동안 다양한 질병과 싸워야 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롭지 못했다. 결혼은 한 적이 없으니 가정생활이랄 게 없었고, 자신이 사랑했던 조카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베토벤의 운명은 베토벤에게 끝없는 시련을 줬다. 베토벤은 그 시련을 극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련을 예술적 창작력의 근원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이덕희 책은 베토벤에 대한 짧은 전기와 동시대인들이 본 베토벤에 대한 평가, 그리고 베토벤이 쓴 편지들로 구성돼 있다. 동시대인들의 평가나 베토벤의 편지들을 통해서 베토벤에 대한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토벤의 초상들은 그의 얼굴을 골상학적으로 상당히 훌륭하게 재생하고 있지요. 하지만 어떤 판화가의 바늘도 그의 얼굴을 덮고 있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슬픔의 표정을 표현하지는 못했어요. 짙은 눈썹 아래서 그의 눈은 마치 동굴 속에서 나오는 빛처럼 반짝였어요. 눈은 작았지만, 그 시선은 나를 꿰뚫어보는 것 같았어요. 음성은 부드럽고 약간 은근한 투였어요.
-자키노 로시니, 왜 베토벤인가 24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