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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지금 Nov 07. 2024

식세기 건조기 청소기 없이 살아보니

식기세척기는 한국에서도  없이 지냈기에 여기서 매일 하게 되는 손 설거지가 당연한 일과이긴 하다. 다만 한국에서는 퇴근 후 주로 저녁때 한번 하면 되었던 일이 여기서는 매일 꼬박꼬박 3번씩은 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아이들도 어린이집으로 유치원으로 가고 저녁식사만 했는데 지금은 두 형제가 모두 종일 집에 있으니 아침 과일에 두 끼씩 먹는 기본 식사 거기에 중간에 찾는 간식까지 포함하면 자잘한 설거지도 더해진다.


옛날 오래된 프러포즈에 빠지지 않았던 "손에 물 안 묻게 해 주겠다."는 말이 이루어지지 않을 공약임을 뻔히 알면서도 설레었을 수많은 우리네 윗세대 여인들의 마음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렇게 매일 손에 물을 묻히며 설거지를 하고 있다.

몸이 피곤할 때면 매일 반복되는 설거지가 참 귀찮고 힘들게 느껴진다. 먹고 치우고 다시 먹고 치우고의 반복이 지루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살림은 "먹고 치우고 또 먹고 치우며 산다."에 담겨 있음을 직접 해보니 알겠다.


꼭 설거지라는 행위에 어떤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찾지 못해도 소소한 즐거움을 만들어가며 피곤함이나 지루함을 덜어보려고 한다.


설거지 거리가 나오면 가급적 바로 해버린다.

모아서 한꺼번에 하는 게 더 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시각적으로 정돈된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친다.


 설거지할 그릇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주방을 대할 때면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온다. 귀찮음을 털고 후루룩 설거지를 한다. 잘 빨아놓은 흰 수건을 바닥에 깔아 건조대에서 나오는 여분의 물기도 바로 흡수하도록 한다.


내 눈과 내 손이 닿는 곳만큼은 가급적 깔끔하고 간결하게 정리가 되어있도록 조금씩 더 신경을 쓴다.


설거지를 끝내고 마른 수건으로 싱크대 위까지 싸악 닦고 나면 주방은 한결 정갈하고 차분해진다.


매일 하는 설거지를 일상의 미니멀한 풍경으로 바꾸는 것.

내가 소소하게 만들어가는 살림의 즐거움이다.


한국에서는 건조기가 필수였다. 어린아이들이 자라다 보니 늘 빨래가 한가득 나왔다. 세탁기 용량이 적은 게 항상 아쉬웠다. 빨랫대를 다 펼치기도 힘든 작은 베란다 공간에 정오 무렵이면 앞동에 가려져 이미 햇살이 걷히는 아파트 1층에서 건조기는 우리 집 살림의 가장 큰 조력자였다.


이스라엘에 와보니 세탁기 크기는 더 작아졌다.

대신 작은 화단에 햇살이 가득하다.

 빨랫대의 양 날개를 끝까지 다 펼치고 안 쓰는 의자를 다 끌어모아 이불도 베개도 거침없이 햇볕 아래에 넌다.


햇빛이 워낙 강하다 보니 빨래를 널고 반나절이면 바로 입어도 될 만큼 넉넉히 마른다. 햇빛에 말린 빨래는 건조기로 하는 기계식 건조와는 다르다. 일단 서걱거릴 정도로 바짝 마른다. 세탁세제의 인공적인 향도 다 날아가버린다. 대신 바람과 공기의 흐름과 은근한 향이 배어있다.


방금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훔친 후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맨 얼굴처럼 깨끗하고 약간의 푸석함이 같이 있다.


빨래를 햇살 아래에서 하나하나 널다 보면

그저 바로 건조기에 넣을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시간을 들여 내 몸을 움직이며

하나의 활동을 정성스럽게 해 갈 때

느껴지는 뿌듯함이 있다.


빨래라는 살림이

그저 빨리 해치워버려야 하는 일거리가 아니라

나의 정직한 성실과 성의가 녹아들어 가는

내 일상이 되는 느낌이다.


허리를 굽혔다 펴고 손을 들었다 내리고

종종걸음을 옮기며

빨래를 너는 동작 하나하나를 자연스럽게

의식하게 된다.


기계와 기계사이에 중개인이기만 했던 내가

비록 세탁기가 빨래를 다 하긴 했지만

의지적으로 너는 행위를 하면서

실제 살림을 만들어가는 창조자와 책임자가

되는 주도적인 자리를 세워가는 것 같다.


청소기가 없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하루 두 차례 씩 집안 곳곳을 쓴다. 물수건으로 바닥을 훔쳐주면 우리나라처럼 맨바닥에 맨발로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청소기가 없어서 불편한 점도 많다.

특히 건기 때는 먼지가 많아서 빗자루로 쓸어도 먼지가 공처럼 굴러다니기도 한다. 물걸레질을 하고 한번 더 쓸어주면 먼지도 가라앉고 바닥도 매끈하다.


청소기로 한번 싸악 밀어주면 짧은 시간 안에 간단하게

마무리가 될 청소시간인데 빗자루로 쓸고 쓰레받기에 모으고 물걸레로 닦기까지 하면 제법 품이 든다.


청소도 그저 빨리 해치워야 할 일이라고만 들면

힘도 들고 지루하고 짜증부터 들기가 쉽다.


그래서 동작에 집중을 한다.

쓴다. 여기서 저기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 구석도 저 구석도. 모은다. 티끌. 먼지. 잔쓰레기들. 마른 밥알. 과자 부스러기.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 몸의 동작들에 신경을 모은다. 내 몸의 흐름과 느낌에 마음을 쏟다 보면 청소라기보다는 하나의 스트레칭 같기도 하다. 몸을 움직이다 보면 생각이 잠잠해진다.

적당히 몸을 쓰다 보면

한결 활기가 돌고 기분이 가벼워진다.


빗자루로 쓸고 물걸레로 닦고.

몸이 움직이며 자연스럽게 샘솟는 에너지와

맑은 기운에 주목한다.



식세기. 청소기. 건조기.

필수처럼 여겨지던 가전 없이 살림을 살고 있다.


살림과 나를 구분 짓던 기계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오히려 살림과 내가 더 가까워지고

그 진정성을 더 생생하게 체험되는 것 같다.


기계가 대신하던 일들을  내 손과  내 발을 바지런히 움직여가며 직접 해가면서

살림과 분리되기보다는

살림과 친해지는 시간을 보내는 것 같기도 하다.


살림이 그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억지 수고가 아니라

나의 하루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결국 나의 시간과 생각과 마음에

깊이 연결되는 삶이 되어간다.


삶은 좋고 싫은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고

나의 살림도 그런 것이 된다.



덧붙임.

그렇다고 해서 가전을 다 없애고 살겠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솔직히 한국으로 돌아가면 식기세척기와 무선 청소기부터 마련해야겠다고 생각 중이다.

다만, 가끔 한 번쯤 늘 쓰던 기계를 끄고 직접 내 몸으로 살림이라는 시간을 이끌어가 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몸을  쓰며 그 에너지가 소진되기보다는 오히려 적당히 유지되고 생기가 도는 살림의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가장 큰 소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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