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얼마나 행동에 큰 영향을 주는지 이제 이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지나간 삶의 모습들을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된다.
중학교 1학년때 교탁 위에 석고로 된 원통을 놔두고 미술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그대로 그려보라고 하셨다.
무엇에 초점을 둬야 하는지 그리고 이 활동의 의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수업 도입부에 설명을 해주셨을 것이다. 다만 왜곡되는 기억과 시간의 합작으로 인해 전혀 기억이 안 날 뿐.) 그야말로 보이는 대로 그리고 있는데 내 책상을 지나가시면서 미술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찌그러진 깡통 같다."
수치심으로 눈물을 보인 나에게 복도밖으로 나가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참 추운 기억이라 겨울이 되면 가끔 그때 생각이 난다.
그때 이후로 미술학원까지 다니며 나의 원통은 찌그러진 깡통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나는 미술을 잘 못해"라는 이 부정적인 생각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큰 키에 마른 체형. 그래서일까. 초등학교 때 학교대표로 육상선수를 뽑는다고 체육선생님은 각 반에서 달리기를 잘할 것 같은 아이들을 무작위로 뽑았고 우리는 일정기간 따로 운동장에서 달리기 훈련을 했다. 한 남학생은 이렇게 손을 칼날같이 세워서 앞뒤로 세게 흔들며 뛰어야 속도가 잘 난다고 조언을 해주었고 이후로 긴장으로 꽉 쥐었던 양손을 풀고 당장 무라도 쓸듯 기를 모아 양팔을 흔들기는 했으나 속도는 전혀 칼날같이 벼려지지를 못해 훈련 며칠 후 나는 출전선수에서 제외되었다. 그렇게 고3이 되어 그때까지만 해도 중요했던 체력장에서 100M 달리기를 마치고 들어오는데 초시계를 들고 서계시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 뜨거운 물 부은 사발면 들고뛰어도 너보다는 빨리 뛰겠다."
물론 이때의 기억은 앞서 미술시간과는 다르게 그렇게 차갑게 남아있지는 않다.
초시계는 20초대를 넘어있었고 제일 늦은 그룹에 들어온 것도 맞았고 그 선생님께서 웃으시며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자 하신 의도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운동은 아니네"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키우는데 일조한 것은 맞다.
초등학교 4학년때는 언니와 함께 동네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꼬박 1년 정도를 다녔는데 같이 다닌 언니보다 실력은 늘 뒤처졌다. 나보다 어린 남학생의 현란한 솜씨를 넘겨보며 부러워하다 어영부영 피아노 학원을 안 가게 되었고 지금 나의 피아노 실력은 "꽃피는 고향"에 머물러있다.
고향에 꽃은 피었는데 나의 피아노에 대한 마음은 봉오리도 맺지 못하고 지금까지 왔다.
어젯밤 큰아이가 유치원에서 '눈치게임'을 하는데 매번 자기는 탈락이 된다고 울면서 게임하기 싫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저 선생님이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자고 제안해서 같이 하는 건데 울기까지 하는 아이를 보면서 처음에는 답답하기도 하고 왜 이렇게 예민한가 싶어 염려가 들기도 했다.
그러나 6살 첫째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첫째는 혈액형이나 외양은 아빠와 붕어빵인데 성격이나 기질은 나를 닮은 부분이 많다. 그래서 나에게 야단도 더 많이 듣는다.
낯선 것, 낯선 곳, 낯선 사람.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데 심적 부담이 크고 적응에 시간이 걸리는 면. 예민해서 주변 환경이나 말이 쉽게 동요되고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쉬운 면. 아닌 척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을 많이 의식하고 영향을 받는 면. 책을 좋아하고 혼자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면.
그래서 첫째는 자주 울고 짜증도 많다.
그런 짜증이나 징징대듯이 울거나 하는 부정적인 표현이 행여 습관이 될까 염려되어 나는 나의 불안을 포장한 채 아이를 질책한 적이 많다.
그러나. 첫째는 나와 닮았지만 나보다 단연코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솔직함이다.
나는 가리고 눈치 보고 덮어버리고 힘들면 차라리 조용히 그 자리를 피하는 쪽을 늘 선택했지만
첫째는 울면서, 짜증을 내면서 나에게 일러주면서 계속 자신이 힘들고 아프고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날것 그대로의 반응을 불안과 걱정으로 받아주지 못하는 나와 자주 부딪히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큰 아이를 그때의 나를 대하듯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끄러웠고 무서웠고 당혹스러웠고 움츠러들었고 도망가고 싶었던 그때의 나.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어떻게 반응할까.
적어도 지금 첫째에게 하듯 매몰차게 참고 좀 하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의 불안과 걱정을 첫째에게 전가하지 말고
그때 보호받지 못하고 혼자 떨었던 나에게 다가가듯 첫째를 대한다면
나보다 훨씬 자신의 감정표현에 충실한 첫째가 점점 자라면서 나보다 더 성숙하게 자신의 감정과 그 반응을 조절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 생각을 놓치지 말고 오늘 첫째가 혹시나 짜증을 낼 때 마음껏 엄마에게 짜증 내지 못했던 그때의 나를 대하듯 한번 대해봐야겠다.
어쩌면 첫째보다 그때 어린아이였던 내가 눈물을 훔치고 밝게 웃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