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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Aug 12. 2023

그리니치에서의 하루

따로, 그러나 또 같이 만들어 가는 우리의 여행


런던에 온 지 이틀이 지났다. 처음 유럽을 계획할 때 파리와 이탈리아에 집중하기로 해서 영국은 잠깐 들러 뮤지컬이나 한 편 보고, 시차 적응을 위한 도시로만 계획했다. 나는 런던이 처음이었고 남편은 두 번째였으나 미식 여행을 즐기는 남편 역시 영국은 별로 할 게 없다며 짧게 머물다 가기로 했었다.


그러나 이틀 지낸 런던은 비록 친절하지는 않지만 (거의 한 명도 친절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딱히 불친절하지도 않으며, 필요 이상으로 말을 걸거나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도 않았다. 우리 같은 여행객들에게 적당한 무관심과 또 적당한 배려가 오히려 우리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해서 편안하기도 했다.


첫날의 영국은 맑고 화창했지만 오늘부터는 이내 흐려졌다. 흐린 런던은 몹시 추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런던에 살고 싶다던 큰 아이는 아무래도 추워서 여기 못 살 것 같다고, 우리는 런던은 이제 여름은 끝났나 보라며 우스개 소리를 했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뮤지컬을 본 터라 천천히 일어나 내셔널 갤러리에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러 갔다. 피곤한 아들들이 미술관을 즐겨줄 리가 별로 없기에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유명 작품만 찾아보기로 했다. 고흐, 고갱, 세잔 등의 작품들을 보다가 큰 애가 램브란트 그림도 보자기에 안내에 가서 물어보니, 우리가 지나온 방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쿨하게 포기하는 쿨남의 면모를 보여준다.

해바라기 보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흐 그림의 존재감은 역시! 모네는 미술관 안 좋아하는 큰 애도 사진을 찍게 만들었다.



시차 적응이 덜 되기도 했고, 평소보다 많이 걷는 일정에 애들이나 우리나 좀 피곤해졌지만 오후 일정은 그리니치 천문대였다. 그리니치에서 피크닉을 좀 더 즐기고 싶어 돗자리까지 들고 왔는데 쌀쌀해진 오후 날씨에 그저 호텔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애들을 살짝 떠보니, 큰 애는 천문대에 큰 미련이 없어 보이고, 막내는 원래 별로 의견을 말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그냥 호텔로 갈까 하던 중에 막내가 나지막하게 “엄마 그래도 그리니치는 가야 하지 않아?”


그래서 버스를 타고 그리니치로 향했다. 사실 그리니치는 위도 경도를 막 배운 둘째 때문에 세운 일정이었는데, 말은 안 했지만 둘째도 그걸 알고 있었고 기다렸었나 보다. 오늘 보니 그곳에서 피크닉 할 때 쓸 돗자리도 하루 종일 둘째가 들고 다니고 있었다


그리니치에서 아이들과 남편은 천문대 관람을 보내고 본초자오선에 큰 관심이 없는 나는 그리니치 파크를 돌아보기로 했다. 그리니치 천문대는 그리니치 파크에서도 언덕 위에 있어 템즈강까지 내려다볼 수 있는 경관이 좋은 위치에 있었다. 가져온 돗자리를 깔고 커피 트럭에서 라테를 한 잔 사들고 앉았다. 집을 떠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흐린 날이었지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과 사진 찍는 사람들, 피크닉을 즐기는 연인들, 가족들, 산책을 즐기는 개들, 그리고 거기에 내가 앉아 있었다. 피로가 겹치기도 했지만 다소 몽롱한 상태였던 나의 상황 때문인지 그 시간이 비현실적으로 몽환적이었다. 평화롭고도 고요해지던 그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관람을 마친 남편과 아이들이 나에게 왔다. 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건만 둘째 아이는 나에게 달려와주었고 이내 돗자리에 덜렁 누워버린다. 조류공포가 있는 우리 큰 애도 비둘기들을 피해 조심히 내 옆에 앉는다. 아이들 데리고 관람과 사진 촬영에 심혈을 기울였을 남편이 심심하지 않았냐며 내게 물으며 돗자리에 들어선다.


몽환적이었던 나의 그리니치 풍경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의 여행의 행복의 조각들은 이렇게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맞춰지는 것을. 혼자 즐긴 시간에 깨닫게 된다.

그리니치 파크의 고즈넉함은 혼자 마신 커피와, 덜렁 누워버린 아이들로 채워졌다.

@ 대문 사진은 그리니치를 가기 위해 이층 버스를 타고 가며 보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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