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허무의 시간을 딛고 바르게 나이 드는 법 찾기
‘주장하는 글쓰기’ 단원의 수업을 준비하며 아이들과 글을 쓸만한 주제를 찾기 위해 사회면 기사를 읽어보던 중에, 노인들이 인천 공항에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한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수도권에 사는 노인들은 지하철 비용이 무료이니, 지하철을 타고 인천 공항에 와서 비행기 뜨는 것도 보고 한나절 쉬었다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중 한 할아버지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그냥 시간을 보내는 거지.”라는 말이 내내 생각났다. 젊은 시절에는 시간이 어찌나 바쁘게 지나는지 때로는 야속하기도 했을 텐데 인생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냥 시간을 보내기만 하게 되는 건가.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는 모습의 노인을 떠올리며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묵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의 허무함을 느끼는 것이 어찌 노인뿐일까. 아이를 키우며 바쁘게 살던 부모들은, 열심히 키운 아이들이 갑자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걸어가며 모질게 반항할 때 지난 시간의 허무를 느끼며, 직장 생활에서도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룬 게 없다고 느껴지는 그런 순간,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질 수 있다. 희망과 의미를 찾아 헤매는 시간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결국 인생의 허무는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삶의 과정인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허무를 딛고 시간을 그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누리며 건강하게 걸어 나가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작가가 들려주는 로마 사상가 키케로의 이야기가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내려놓게 해 준다.
키케로에 따르면, 육체적 활력은 관리만 잘하면 노년에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육체적 활력 없이도 노인이 잘 해낼 수 있는 여러 활동이 있다. 특히 ‘계획과 명망과 판단력’이 필요한 일들. 공부랄지, 교육이랄지, 상담이랄지 하는 것들. 한가해졌으므로 그런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너무 즐거운 나머지 “공부와 연구를 하는 사람에게는 노년이 언제 슬그머니 다가오는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중략) 이와 같은 노년의 변호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이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자네들은 내가 칭송해 마지않는 것이 어디까지나 젊었을 적에 기초를 튼튼하게 다져놓은 노년이라는 점을 명심해 두게나.”
키케로의 조언에 따르면, 노인이 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젊었을 때부터 건강 관리를 잘하고,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며, 또 충분한 성장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고령화된 사회에서 흔하게 듣는 말이 ‘노후 준비’이다. 사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노후 준비’란 경제적 준비일 때가 많다. 그러나 진정한 ‘노후 준비’는 노후에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는 것 같다. 그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건강과 충분한 성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 같다. 우리 아빠는 등산을 좋아하셨는데 60대 후반에 들어서서는 무릎이 아프셔서 등산을 더 이상 하시지 못하게 되었다. 가끔 산에 아직도 산에 올라가는 친구들의 사진을 보며 부러워하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릿하다. 지금 하고 있는 취미를 노년의 삶까지 하려면 내 몸을 더 아끼고 건강하게 돌보아주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았다. 할머니쯤 되면 나의 요리 실력도 나아져 나에게도 나만의 음식 레시피가 있으려나. 그때쯤이면 멋지게 김치도 담그고 온갖 건강 음식들도 척척 해 먹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되면 눈이 잘 안 보여서 책을 읽는 이 취미를 계속할 수 있으려나. 그래도 오디오북이 있으니까 책을 읽는 취미는 책을 듣는 취미로 이어질 것 같다. 엄마도 아빠도 무릎이 안 좋으신 걸 봐서 나 역시 빨리 무릎이 망가지려나. 그러면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할까? 그렇다 해도, 산책을 쉬지 않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열 보 걷고 한동안 쉬어야 하더라도 할머니들은 보통 시간 부자니까, 바깥공기를 맡고 햇볕을 쬐는 시간을 꼭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리 미리 준비를 하고, 공부를 해도 나의 노후는 환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문득문득 지나간 시간이 허무하기도 그립기도 할 것 같고, 쓸데없는 고민과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할 것 같다. 그때 되면 경제 활동도 안 하니 연금이 있다 해도 돈 걱정하는 삶은 여전하려나. 그래도 한 가지 단단해진 마음이 있다면, 열심히 사는 지금의 순간순간과 생활 습관들이 모여 내 노후 준비가 되어줄 것이라는 것. 막을 수 없는 허무의 시간이 온다고 해도 금방 흘려보내고 또 새로운 나날을 맞이하고 기대하며 나이 들고 싶어 진다.
나는 잘생긴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잘생기기를 바라며, 건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하기를 바라며, 지혜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혜롭기를 바란다. 나는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를 바란다. 사람마다 다양한 재능이 있다. 혹자는 살아남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척하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데 일가견이 있다.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삶을 원한다. 산책보다 더 나은 게 있는 삶은 사양하겠다. 산책은 다름 아닌 존재의 휴가이니까.
<@ 표지사진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 김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