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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Nov 07. 2024

시와 함께 하는 저녁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

용기가 나지 않는 요즘이다.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을 고민하지 않는 나인데 ‘에이 그때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하며 극단적 낙천주의에 해당하는 대책 없는 나인데 요즘은 다가오지 않은 날들이 만들어 내는 두려움을  끌어다가 미리 한껏 걱정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내일에 대한 뚜렷한 계획을 세울 수 없는 것이 인간사일 텐데도 요즘의 나는 평소답지 않게 미래의 고민을 끌어다 끙끙대고 있다. 이런 미리 하는 걱정과 고민은 문득 밥맛이 떨어지게 만들고, 숙면을 방해하기도 한다. 마음의 근심은 몸에도 생채기를 남겨야 끝나는 것인가.


용기 없는 나날. 매일을 고군분투하지만 내년을 생각하면 암담하기만 한 요즘이다. 힘든 일을 하고 있지만 이제 곧 끝난다는 감각은 버틸 수 있는 힘을 조금 늘여주는 것 같은데 내가 요즘하고 있는 일들은 끝이 쉬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도 힘든데 내년엔 홀로서기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문득 외롭기도 힘들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한다.


내가 해내고 있는 일들이 하나같이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러다 보니 한숨이 쉬이 나오고 가슴이 자주 답답하다. 친한 사람들과 웃으며 떠들다가도 이내 걱정이 나의 마음을 잠식한다. 하. 나는 어쩌다가 이리 걱정형 인간이 되었단 말인가. 하루 중에 조금도 허투루 쓰지 못하고 일한 것 같은데 여전히 끝내지 못한 일들이 한가득이다. 이런 괴로운 마음이 가득한 채로 글쓰기 모임에 갈 채비를 한다. 글쓰기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지쳐 있던 나를 충전해 주는 소중한 시간이니까, 늘 징징대는 내 모습이 어떨까 싶으면서도 글을 쓰며 치유받는 감각이 너무나 필요한 요즘이다.


사실 지난 주말,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성수동에 다녀왔다. 성수동에서 각자 하고 싶은 것들은 달랐지만 한 가지의 교집합을 찾았는데 그건 ‘point of view’라는 문구점에 쇼핑을 가는 것이었다. 문구 덕후인 큰애와 나는 이전에도 가 본 적이 있었고 처음 방문했을 때 이미 완벽하게 취향을 저격당했는데 우리의 칭찬을 내내 들었기 때문인지 남편과 막내 도 함께 기대해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침, 문학동네 출판사의 시집인 ’ 문학동네 시인선‘의 팝업 전시가 있었다. 가을의 문구점에서 시라니. 가을을 만끽하는 가장 낭만적인 날인 것만 같았다. 사실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로 부쩍 힘들어하던 큰애였다.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 잘해나가는 것만 같은데 내면의 고민이 깊어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날들이 거듭되는 것 같았다. 아이의 어두워지는 표정을 지켜만 봐야 하는 게 힘들던 요즘이었다. 그런데 아직 오픈하지 않은 문구점의 유리창에 이런 시구가 쓰여 있었다.

우리는 사랑으로 함께 시간을 뚫었다.
<@고명재,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그래, 우리가 사랑으로 함께 뚫어왔던 숱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시간을 잘 헤쳐왔던 우리니 지금의 이 시간도 사랑으로 잘 건너가 보자고 나를 다독였다. 시의 한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격려와 위로가 새삼 고마웠다. 그리고 그때 어떤 모습의 나일지라도 항상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는 글쓰기 모임의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녀들에게 선물할 시집을 한 권씩 골랐다. 시가 딱 열 편만 담긴 작은 시집이었다. 시가 주는 따뜻한 위로를 함께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말에 그렇게 시의 격려를 받았으면서도 이내 현실에 지쳐 걱정형 인간이 된 나는 글쓰기 모임에 와서 친구들에게 시집을 한 권씩 나누자며 내밀고 나의 일상의 힘듦을 털어놓았다. 일상의 어려움을 대화로 나누다 보니 나의 일상이 폐허처럼 느껴진다. 모래바람이 가득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폐허에서 혼자 버둥거리며 출구를 찾는 것만 같았던 나에게 다정한 친구들의 눈빛이 더해진다.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를 받으니 내가 지나온 오늘의 일상이 폐허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다정한 눈빛의 격려란 어쩜 이리도 힘이 세단 말인지.


세상에서 가장 느린 산책로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


폐허에서 혼자 서 있는 기분으로 이곳에 왔다. 쓰러진 풍경을 바라보며, 나의 내일일까 봐 두려웠을까. 넘쳐나는 일들을 해내며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인지를 되묻던 요즘이었다. 그런 공허한 마음으로 만난 친구들은 따뜻한 글과 대화로 나와 산책을 나눠줬다. 그랬다.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것. 함께 모여 글을 쓰는 우리의 재능이었다.


사라지지 않는 생각이 나를 쓰다듬고 있어
생활이라는 건 감각일까 노력일까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


내일 내가 마주할 하루는 또 폐허일지도. 나를 메마르게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오늘의 감각을 기억하고 싶다. 오늘의 따뜻함과 다정함을 이 사라지지 않는 생각이 내일의 나를 쓰다듬어 주기를. 이런 노력을 모아 내일을 걱정이나 두려움이 아닌 다정함이라는 감각으로 채우고 싶다. 작은 시집을 내어 밀고 큰 다정함을 받아 안고 온 시 읽는 저녁 시간이 나는 참 좋다.


(표지 사진은 시 읽고 글 쓰는 우리들. 타닥거리는 타자 소리가 문득 장작이 타는 소리처럼 느껴져 마음이 평안해진다. 늘 나를 평안하게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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