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언제든 제철.
푹푹 찌는 날씨, 이글거리는 태양에 숨 막힐 듯한 습도. 유난히도 빨간 과일이 많이 나오는 때. 어려서부터 나는 여름이 좋았다.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일까. 무더위는 내 여름 사랑에 큰 걸림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기에 뭔가 고전적인 방법으로 더위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차가워진 마룻바닥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동생과 수다 떨기, 차가운 수박을 서걱서걱 먹기 그러나 이내 옷 한가운데엔 수박물이 잔뜩 떨어져 옷에 연한 수박 얼룩을 만들기, 또 토마토에 설탕을 뿌려 냉장고에 엄마가 넣어 두면 학교 다녀오자마자 부리나케 냉장고부터 열어 서서 토마토 먹기. 이런 기억 때문인지 나에게 여름은 덥다기보다 기분 좋은 시원함으로 기억된다.
내가 어렸던 시절은 지금보다 덜 더웠으려나. 하지만 그때는 에어컨 같은 급속하게 더위를 식혀주는 장치가 없었기에 더위에 몸이 적당히 적응했던 것일 수도 있다. 무튼 여름의 가장 큰 적인 더위를 크게 타지 않는 체질이라 내게는 여름이 일 년 중 가장 기다려지는 계절이다.
학교를 12년 다니다가 교사가 되어 지금도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학교 생활을 계속하면 할수록 여름은 더 기다려지는 계절이다. 3월부터 시작되어 앞만 보고 달리던 1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막연하게 여름을 기다렸다면 지금은 7월 중순 즈음을 구체적으로 기다린다. 여름이란 이제 내게 완벽한 휴식의 계절이므로. 일상의 바쁨에 미처 누리지 못한 휴식을 유예했다가 여름에 왕창 몽땅 써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여름은 달랐다. 우선 올해부터 대학원에 진학해서 방학 중 절반 가량은 대학원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또 연구회에서 하는 연수 운영에도 참여해야 했고, 내가 신청해 두었던 교과 관련 연수도 무려 40시간가량 들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인근 학교에서 강의 의뢰를 받아 기쁜 마음으로 응했던 터라 낯선 학교에서 강의도 해야 했다. 이렇게 길게 썼지만 그렇다. 이번 여름은 유예된 휴식을 누리는 시간이 아니라 일의 연장선상이었다. 거기에 학교에 가지 않는 두 아들도 중간중간 챙겨야 하니, 오히려 더 바쁘게 보내야 하는 때가 되었다고나 할까.
이번 여름은 큰애가 열흘가량 따로 체험학습을 떠났기 때문에 온전체로 여행 한 번 가기가 어려웠다. 서운해할 둘째를 위해 1박 2일 일정으로 서울에 다녀왔을 뿐 바쁜 엄마 때문에 이렇다 할 가족 여행도 못했다.
해야 할 공적인 일들을 마치자 이제는 집안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주부인 나에게 방학은 유예된 휴식만 하는 기간이 아니라 유예된 집안일들도 기다리는 때이다. 미뤄두기만 했던 책장 정리 때문에 책장 근처에 새로 산 책이 쌓이고 있었다. 서랍장에는 받은 엽서와 새 엽서가 뒤섞여버렸다. 아이들의 옷장은 하의 칸과 상의 칸이 뒤섞여 대 혼돈의 상태였고 우리 옷장에도 여전히 긴팔 옷 몇 벌이 여름옷들과 함께 섞여 있었다. 주방은 어떤가.... 더 이상 쓰지 않겠다. 문을 열 때마다 정리를 외치던 서랍장들과 옷장과 책장을 정리하고 나니 이제 정말 개학이 코앞이다.
계속 바쁘게 보냈는데 할 일들의 대부분을 해냈는데도 마음이 이상했다. 아직도 무언가 못한 것이 있었다. 뭘 더 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일들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집도 대충 깨끗해졌고 공적인 일들도 다 끝냈는데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러던 중 예전에 신청했던 '신연선'소설가의 '구름이 겹치면'이라는 소설의 북토크 일정이 다가왔다. 오래전 방학의 마무리로 함께 하자며 친구들과 신청했던 북토크였다. 미처 책을 다 못 읽었던 나는 밀린 숙제를 하듯 부랴부랴 소설을 읽고 동네 책방으로 그것도 해야 할 업무 하나를 하다가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신연선 작가의 '구름이 겹치면'이라는 소설은 여성 범죄 피해자와 가정폭력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세상 속으로 걸어 나올 수 있게 되는 이야기였는데 무거운 소재와는 다르게 다정하고 따뜻한 문체에 줄곧 주인공을 응원하며 읽은 소설이었다. 작가님의 맑은 표정과 말을 들으니 오랜 독서와 사색은 사람을 맑게 하고 다정하고 따뜻한 글을 쓸 수 있게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과 편집자님이 책 이야기를 하며 웃을 때 나 역시 아주 환하게 웃었던 것 같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고 온 두 시간이었는데 북토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내가 잊고 있던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 올여름 바빠서 그걸 많이 못했구나. 이번 여름 내가 미처 놓치고 있었던 것들은 그런 것을 많이 하지 못한 것이었다. 충분한 휴식과 독서, 글쓰기, 좋아하는 사람과 따뜻한 대화와 식사, 가보고 싶던 곳들 가보기. 바빠서 많이 못한 것들. 그런 것들을 많이 못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조급해졌다.
같은 동네에 사는 좋아하는 선배 선생님께 연락해 함께 아침을 먹자고 했다. 흔쾌히 응해주셨다. 약속을 잡고 읽다 만 책들을 끝까지 읽었다. 가보고 싶었는데 미리 예약해야 하는 곳이라 번번이 놓치고야 말았던 근처 책방의 개인석을 예약했다. 그러느라 필라테스를 한 번 취소했다. 지금 필요한 건 운동보다 휴식이라고 변명하며.
중간까지 읽다가 진도가 안 나갔던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오랜 수양 끝에 '이제는 사랑이야말로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네'라고 말해 나의 2학기는 사랑으로 채우겠다고, 내 주변의 것들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시기로 삼겠다고 다짐하게 했다. 또 오은의 산문집 '뭐 어때'에서는 '오늘부터 쉬는 시간을 정하기로 했다. 그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하는지 살피기로 했다. 최고의 휴식법은 아니더라도 최적의 휴식법을 찾으려 한다. 휴식을 허락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일을 기다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두근거린다.'며 쉬고 싶어 종종거리는 나를 응원해 주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소소하지만 즐거운 대화, 읽던 책의 문장이 던져주는 용기와 격려, 처음 가보지만 마음을 빼앗겨버린 책방에서의 고요하게 누린 내 시간. 충분하지 않았지만 나를 위한 약간의 휴식을 더하니 이제는 개학을 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올여름 누린 나의 제철 행복은 이거였다. 나를 위해주는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것은 방학에만 여름에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상 중에도 내가 나를 위하는 마음만 있다면 계속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가. 그러니 나를 위한 행복 찾기는 일상 중에도 계속하고 싶다. 그렇게 나를 위하는 마음을 갖고 나아가는 2학기. 내가 만들어가고 싶은 남은 올해의 제철 행복이다.
@인용 구절은 헤르만헤세 '싯다르타', 오은 '뭐 어때'
@대문 사진은 예약제로 운영되는 책방에서의 오롯한 시간을 기록하려 찍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