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요석 리그에서 생존하기

듀오링고와 함께하는 매일의 저녁

by 주연

열심히 달리기를 한다던 나의 일상은 지난 9월까지였다. 긴 연휴가 지나고 쌀쌀한 바람이 불자, 달리기는커녕 외출 빈도도 줄어들었다. 추우면 잘 나가지 않는 나에게 집에 있는 저녁 시간이 길어지는 계절이 되었다. 집에 있는 저녁 시간이 길어지자 사부작거리며 옷장을 정리하기도 하고 싱크대를 닦기도 했다. 어떤 날은 축구경기를 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책을 많이 읽기도 했다. 그렇게 집에서의 매일의 일과는 약간씩 달라졌지만 변함없는 일과는 저녁 식사 후 소파나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듀오링고 어플로 영어공부를 하는 것이다. 주변의 소개로 듀오링고 어플을 깔고 영어 레벨테스트를 한지 어언 100여 일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듀오링고를 통해 가느다란 영어 공부를 하며 몇 번의 레벨 업그레이드를 경험했고 리그 승급과 강등을 번갈아 경험했다.


실제로 듀오링고를 사용하는 사용자의 90프로는 무료 어플을 사용한다는데 나는 짧은 광고도 보기 싫어 어플을 며칠 체험한 뒤 바로 유료로 결재해 버렸다. 조금 비싼가 싶긴 했지만, 자본주의 시대에서 자본은 귀찮음을 삭제해 주니까. 그리고 이내 가족들을 내 계정으로 초대했다. 엄마가 덜컥 유료 결제를 했기에 덩달아 내 계정에 초대된 가족들은 어쩔 수가 없이 외국어 공부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다.


영어 공부를 위해 시작한 어플이었지만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스페인어를 시작했다. 지난 스페인 여행 이후 스페인 여행을 다시 꿈꾸는 우리였는데, 스페인은 생각보다 영어 소통이 어려운 나라였었다. 그래서 간단한 스페인어 공부도 하지 않은 우리가 조금 후회스러웠더랬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스페인어를 선택해 기본 인사부터 익힌다. 낯선 곳에서 말이 안 통하는 답답함은 역시 외국어 공부의 최고의 동기인가 보다.


그렇게 시작한 외국어 공부의 세계이지만 게으름은 여전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듀오링고는 나에게 알림을 보내온다. 나의 순위가 밀렸다는 소식도 전해주고 '오늘을 이대로 마무리하진 않을 거죠?'라는 애절한 문구도 보내준다. 또 하루의 피로에 밀려 늦은 밤 듀오링고에 들어가면 돌아올 줄 알았다면 반겨주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매사에 승부욕이 별로 없는 나이지만 듀오링고의 세계에서는 없던 승부욕이 발동된다. 얼마 전부터는 듀오링고의 리그 업그레이드에 욕심을 내고 있는데 이게 전 세계 사람들이 하는 어플이다 보니 쉽지가 않다. 내가 자기 전 열심히 듀오링고로 영어 공부를 해 보석을 모아 순위를 올려놓고 자면 내가 자는 동안 밤이 아닌 나라의 사람들이 열심히 보석을 모아 순위를 바꾸어 놓는다.

어느 날인가는 아침에 눈을 떴는데 듀오링고의 부엉이가 순위가 하락되었음을 알려주는 알림을 보내 눈곱도 채 떼지 못한 채 듀오링고의 어플을 실행해 영어를 말하는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최고 리그인 다이아몬드에 진입하지 못하고 그 아래 단계인 흑요석 리그에 머물러 있다. 이렇게 날마다 내뱉는 몇 문장이 과연 영어 실력 향상에 영향을 주기는 하는 건지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사용하는 교무실엔 원어민 선생님이 일주일에 두 번 출근하시는데, 영어 공부를 가늘고 꾸준하게 하는 사람임에도 간단한 질문이나 인사도 여전히 한참을 망설이고 있다. 실제로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우산을 쓰고 가지 않는 원어민 선생님에게 우산을 건네고 싶었지만 어떤 말로 시작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그녀가 뛰어 나가버렸다. 하.. 듀오링고야 이런 건 언제 극복할 수 있는 거니?


영어 실력 향상은 여전히 요원하지만 나의 듀오링고는 나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알림을 보내주고 틈틈이 응원도 보내준다. 그리고 영어 공부를 하면 얻는 에너지가 보석 모양인 것도 참 좋다. 작고 반짝이는 보석 같은 무언가가 내 안에도 계속 쌓인다고 생각하면 이 영어 어플을 나는 계속 실행할 힘을 얻는 것 같아서이다.


날씨가 쌀쌀해지자 우리 가족은 다가올 겨울 방학에 떠날 여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이번 여행 역시 영어권 국가가 아니기에 이번엔 이탈리아어를 또 추가해 함께 연습하고 있다. 이탈리아 말은 발음도 어려워 여전히 'arrivederci (안녕히 계세요)'와 같은 단어는 완벽하게 발음해내지 못하지만 이탈리아 말로 그 나라사람과 인사라도 나누는 나를 상상해 보며 우선은 계속해본다. 우리도 우리나라에 여행 온 외국인들이 어설픈 발음으로 우리말 인사를 나눠주면 그저 마음이 열리지 않나. 그러니 아이들을 둘이나 데리고 또 낯선 여정을 계획하고 있는 우리에게 다정한 현지인의 눈빛은 여행의 기쁨과 편안함을 더해줄 것이기에, 다시금 가늘고 길게 새로운 언어 공부를 시작해 본다.

다시 함께 갈 곳을 꿈꾸며,,,


매일 저녁이면 각자의 방에서 듀오링고의 알림들이 들려온다. 모두가 새로운 언어로 각자의 세상을 넓혀가게 해주는 매일의 저녁시간이 요즘 나의 즐거움이다. 즐거운 만큼 실력도 향상되길 바라며. 이제 듀오링고를 만나러 가봐야겠다.


(@ 표지 사진은 흑요석 리그의 순위판 3위 안에 들어야 다이아몬드 리그로 승급이 가능하다. 오전엔 3위었는데 어느덧 6위 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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