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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Nov 10. 2021

사랑의 기원

남편을 남으로 인정하는 방법

<아주 오랜 옛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들이 신을 공격하려는 마음을 먹고 실제로 행해서 신들의 분노를 사던 아주 그 옛날에 인간의 성은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남성, 여성이 있었고 남성과 여성을 함께 가진 세 번째 성이 존재했다. 당시 인간의 모습은 지금과 달리 마치 공같이 둥근 모양이었는데, 둥그런 몸에 네 개의 팔, 네 개의 다리가 달려있었고 커다란 얼굴에는 모든 면에서 봐도 똑같이 생긴 두 개의 얼굴이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달려있었다. 인간이 둥글고 둥근 모양으로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각각 해와 대지 그리고 달의 자식들이어서 부모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그들의 부모를 닮은 만큼 능력과 힘이 대단했고 이내 신들까지 공격하려고 했었다. 이에 분노한 제우스는 커다란 벼락을 들어 인간을 둘로 쪼갰다. 장작나무처럼 인간이 둘로 쪼개지자 그들은 서로의 반쪽을 그리워하고 만나면 서로를 부둥켜한고 다시 한 몸이 되고 싶어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자신의 진정한 반쪽을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친밀감과 연애 감정에 강력히 사로잡혀서 마치 같은 물건을 절반으로 잘라 만든 ‘신표’처럼 그 아귀가 딱 맞아 드는 것처럼 서로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 남편과 나는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하여 또다시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이 갈등은 사실 몇 달 전부터 거듭되어 수면 위로 올라왔는데, 수 없이 이야기해보아도 결론은 늘 같았고 이야기를 마치면 기분은 한결같이 씁쓸했다. 남편과 나의 의견 차이는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연애초, 남편과 하나가 되는 과정은 너무나 달콤했다, 우리는 몸과 마음뿐 아니라 생각과 미래에 대한 결합을 했다. 마치 신이 둘로 갈라놓은 몸뚱이가 억겁의 시간을 지난 후 다시 만나 겨우 하나로 합쳐진 것 같았다. 하지만 결합의 달콤함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이내 우리에게는 서로가 얼마나 다른 생각과 욕망과 의지를 갖은 개인인지를 인식하는 시간이 숙제처럼 다가왔다. 남편과 나는 서로의 반쪽임이 틀림없었지만 헤어져있던 기간 동안(만약 신화가 맞다고 가정한다면!) 두 개의 서로 다른 과거를 갖게 되었으니, 우리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다 할지언정 두 개의 서로 다른 영혼을 갖은 타인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다. 단지 서로가 어렴풋이 느끼는 것을 추상적인 단어들로 표현하는 것 외에는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우리의 절단된 상처들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후에 남편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는 나는 나와 남편이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더욱더 뼈저리게 느꼈다. 언어와 문화는 물론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부터 우리 사이에는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표현하는 법을 새로 배워야 했다. 따뜻한 말, 표정 그리고 제스처로 소통에서 오는 오차를 줄이고자 했다. 하지만 5년간의 연애기간을 지나 3년 차 결혼생활을 하면서는 관계를 위한 노력이 늘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마치 외국어를 주기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마련인 것처럼 늘 긴장하지 않으면 ‘사랑의 언어’ 대신 ‘자기중심적 언어’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동안 서로를 잘 알게 된 것도 가끔은 독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다툼은 모든 곳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지형에서 치르는 국지전처럼, 눈을 감고도 손쉽게 서로의 약점을 찾아낼 수 있었고 가끔은 지뢰가 있는 곳만을 골라내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도 있게 되었다.


결혼으로 우리는 가족이 되었지만 그것은 동화 속에 나오는 해피엔딩처럼 상황을 영구적으로 종결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도 제 몸으로 낳은 자식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식 또한 자기 생명의 원천이자 둥지인 부모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가족이 된다는 것은 결코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 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년시절을 함께하며 서로의 자아가 성장하는 것을 봐온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종종 가까운 사이는 우리를 더 외로운 존재로 만든다. 가족 또는 붕우 지교조차 구원해줄 수 없는 이 근원적인 외로움은 너무나 괴로운 것이어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탈출구를 찾는다. 다시 결합 이전의 개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번 갈등을 통해 유럽 사람들의 개인주의가 개개인에게도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는지를 새삼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어학원, 대학원뿐만 아니라 남편과 남편의 친구 그리고 가족들을 두루 겪게 되면서 나는 개인주의의 장담점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단체보다 개인을 중시하는 개인주의는 결코 부정적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 게다가 어느 정도 개인의 개성을 억압하게 되는 공동체의 특징을 평소 좋아하지 않던 나에게는 독일의 개인주의와 꽤 잘 맞았다(물론 사람마다 개인주의 성향의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독일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개인주의라는 용어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공동체 문화를 중시하는 유교가 뿌리 깊게 내린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보다는 확실히 개인주의 성향이 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결혼을 통해 남편과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를 이루게 되니, 어디까지 개인을 존중해야 하고 어디부터 공동체를 우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뚜렷한 경계선을 긋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어렵게만 느껴졌다. 나는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고민했다. 나의 생각은 표정에 마음은 행동에 나타났고 이내 우리 관계의 온도도 현저히 낮아졌다. 홀로 고민을 이어가다 답답하고 서러운 마음에 남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를 가장 슬플게 하는 것은, 너는 항상 우선순위에 네가 있다는 거야. 물론 나는 그걸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는 걸, 그리고 그럴 때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나에게는 항상 네가 일 순위야. 너를 너무 사랑하기에 어디서 무엇을 하던 나에겐 너의 생각이 가장 중요해. 하지만 이건 나의 문제야. 그렇지만… 너에게도 네가 일 순위고 나에게도 네가 일 순위면, 나를 일 순위로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 나도 나를 가장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만 네가 없는 나를, 너보다 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아직도 너무 어려워.”


나는 두서없는 말을 내뱉고는 엉엉 울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다가와 안아주었을 남편은 그날따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괴로운 표정으로 한걸음 떨어져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자신의 서재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다시 집안에는 서늘한 공기가 흘렀다. 그리고는 저녁이 왔다. 침대에 웅크려 앉아 책에서 도피처를 찾고 있던 나에게 남편은 조심스레 다가와 입을 열었다.


“나에게도 일 순위는 항상 너야. 종종 너는 내가 이기적(Selbstsüchtig: 독일어 'Selbst'(자신) 그리고 'süchtig'(중독적인 또는 중독된)가 합성된 단어로 자기 자신이 너무 뛰어나다고 믿거나 자기 중심적 사고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나는 너를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어.”

“이기적(Selbstsüchtig)이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의미한 것은, 그보다 자존감(Selbstachtung: 'Selbst'(자신)과 'Achtung'(주의, 존경)의 합성어로 자기존중, 자존감을 뜻한다)에 가까워. 다시 말하지만 부정적으로 한 이야기는 아니야. 이미 이야기했듯이 나는 오히려 그 점을 본받고 싶은걸.”

“알아,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주었으면 해. 내가 만약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건 어쩌면 내 나름의 자기 방어(Selbstverteidigung) 일지도 몰라. 그로 인해 네가 상처 받았다면 사과할게.”

“… 사실 잘 모르겠어. 머리로는 너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나도 잘 알아. 하지만 가끔은 네가 나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도 노력하는데 잘 안될 때가 있을 뿐이야.”


얼핏 바라 본 그의 풀 죽은 얼굴에서 작은 소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평소 남편은 남들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늘 내 앞에선 이렇게 무장해제가 되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속마음을 이렇게 보일 때마다 나는 어렴풋이 느끼곤 한다. 이 사람도 나에게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그리고 인생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책에서 손을 떼어 남편의 뒤통수를 쓸어주었다. 나의 온기를 느끼자 남편은 긴장이 풀어진 듯 스르륵 몸을 기대어 왔다. 머릿속엔 여러 가지 물음이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었지만 오늘은 꺼내지 않기로 했다. 나는 화가 한풀 누그러진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우리 사이가 그 누구보다 가깝다고 해도, 나는 너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할 수 없어 그리고 그건 너 또한 마찬가지야. 나는 개인으로서의 너를 존중하는 연습을 해볼게. 그리고 나 스스로를 더 사랑하는 법을 배울 거야. 우리 서로의 생각과 의견 그리고 삶을 존중해주자.”

“고마워. 하지만 무조건 덮어 놓고 신뢰하는 것은 좋지 않아. 만약 나에게 불만이 있거나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다면 이야기를 해줘. 우리 대화로 풀어나가자.”


남편은 침대에 놓인 책을 멀리 치워버리고는 나를 꼭 안으며 말했다.

“너는 나의 가족이야. 우린 모든 것을 함께 결정하고 서로를 일 순위에 두어야 해. 네가 행복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

올려다본 남편의 초록색 눈동자에는 나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 남편이 나의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난 반쪽이 맞다 해도 우리는 예전처럼 한 몸, 한마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끊임없는 대화로, 사랑의 눈빛으로 그리고 믿음과 신뢰로 함께 걸어야 한다. 아, 물론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뀐 점이 있다면 서로의 지뢰를 겨우 피하는 것 같은 마음가짐 아니라 서로가 가꾼 정원을 감탄하는 마음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저서 <향연>에서 당시 아테네에서 유명했던 아리스토파네스가 이야기했다고 알려진 이야기를 줄여서 작성했다. 뮤지컬 <헤드윅>에서는 ‘the origin of love’라는 노래로 각색되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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