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쓴 두 편의 글에서 ‘인종차별’에 대해서 다루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것은 인종차별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써의 웃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독일에서 한국인이 아닌 지인들과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얘기를 하게 되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이야기가 공교롭게도 “웃음으로 넘겨, 너도 농담으로 맞받아쳐!”라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편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웃음에 대한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아시겠지만, 이성에 반하는 불합리한 명제의 권위를 무력화시키는데 웃음은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웃음이란 사악한 것의 기를 꺾고 그 허위의 가면을 벗기는 데 요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미의 이름]의 시대적 배경이 중세시대이긴 하지만 현대에 쓰인 작품이니(장미의 이름 초판은 1980년에 출판되었다), 그리 오래된 책은 아니라고 반발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이건 어떠한가? 로마 시대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농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농담은 중요한 문제들을 심각하게 다루기보다는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지적한다**.”
물론 그 역사와 시간이 어찌 되었던 웃음은 (이성에 반하는 불합리한 명제인) 인종차별적 발언이 함의한 부정적인 기를 꺾을 수 있다. 그리고 웃음을 통해 상대에게 '나는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아'하는 메시지를 전하며 자신의 쿨함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선 적극적으로 농담으로 받아치며 그 발언을 한 대상의 무지의 가면을 벗기는데 효과적인 대응법이 될 수 있음에 틀림없다. 물론 여기서 의미하는 웃음이란, 행복 또는 만족감에서 나오는 웃음이 아닌 이성적 사고를 뒤틀어 생각을 전환하는데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다. 실제로 웃음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는 ‘이성’과 함께 인간만이 갖고 있는 능력 중에 하나이다. 인간의 유머 능력에는 높은 수준의 언어 능력과 기억력 그리고 다양한 층위와 입장을 동시에 고려할 수 있는 마음 읽기 능력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충고대로 웃음으로 또는 농담으로 인종차별에 대응하기로 해보자. 우선 에코의 말대로 [무기로서의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 도구를 골라 쓸 수 있다. 그중 웃음의 도구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으로는 ‘풍자’와 ‘해학’이 있는데, 풍자와 해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유머의 대상이 누구로 설정되어 있는가’에 놓여있다. 우선 권력과 부를 갖은 사람을 웃음의 재료로 삼는 것은 풍자에 가깝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전통 가면극인 탈춤에서는 타락한 승려와 몰락한 양반들을 <풍자>하고 남녀 간의 갈등이나 서민들의 곤궁한 삶을 보여주는 데서는 <해학>을 사용한다. 서구문화권에서는 “비극에는 평균 이상의 사람들이, 희극에서는 평균 이하의 사람들이 다뤄진다”는 것을 기준으로 비극과 희극의 차이점을 설명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범부들보다 재물과 권력이 많은 사람들은 풍자를 통해 조롱할 수 있지만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풍자의 재료로 삼을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해학에서는 주로 어렵고 곤궁한 처지에 놓여있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본인’을 웃음의 재료로 쓴다. 따라서 해학의 대상을 풍자하거나, 풍자의 대상을 해학적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을 보는 관중들에게 박장대소 대신 쓴웃음만을 얻게 될 것이다.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독일 사람들은 스탠드업 코미디를 꽤나 좋아한다. 독일의 스탠드업 코미디는 텔레비전 방송뿐만 아니라 아마추어들이 그룹을 지어하는 소규모 공연에서부터 유명한 코미디언의 순회공연까지 열릴 정도로 그 인기와 위상이 높은 편이다. 스탠드업 코미디로 진행되는 독일인의 유머라니 벌써 지루함에 하품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안심하시라. 우연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독일에서 잘 알려진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은 외국인이거나 이민 배경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독일에서 제일 유명한 스탠드업 코미디언 중 절반이 이민 배경을 갖고 있으며 유튜브를 통해 유명세를 얻게 된 신흥 스탠드업 코미디언들 중에도 외국인이거나 이민 배경을 갖고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독일에서 외국인 또는 이민 배경을 갖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한편으론 독일 문화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한 그들의 부모나 이주아동(Migrationskinder)으로 자라온 스스로를 해학의 대상으로 사용하고 또 한편으론 외국인 또는 이민가족을 대하는 독일인들의 위선적이거나 인종차별적 태도를 풍자를 이용해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유명한 스탠드업 코미디언 중에는 여성, 흑인, 이주자 등 ‘소수자’의 삶을 갖은 사람들이 많다. 언어와 웃음으로 소수자로서 가진 애환을 풀어내는 것은 가히 예술에 가깝다.
최근 한국의 미디어에서 이와 비슷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는 바로 콩고 민주공화국 출신 한국의 방송인이자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는 ‘조나단 욤비(Jonathan Yiombi)’이다. 조나단은 한국에서 보낸 학창생활과 오랜 한국생활을 통해 한국문화를 익혔을 뿐만 아니라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그리고 그는 특유의 유머감각과 밝은 성격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삼아 재치 있는 콘텐츠들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조나단의 유머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를 점차 변화시키고 있다. 그는 ‘암살 개그’라고 불리는 유머를 통해 한국인의 비교적 둔감한 인권감수성과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에 있어 인종, 민족, 언어, 종교, 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 사이의 간극을 줄다리기하며 웃음을 유발한다. 여기서 그동안 한국사회가 흑인을 웃음의 대상으로 소비해온 역사와 조나단의 콘텐츠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유머의 대상의 ‘주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는 한국사회에서 흑인의 이미지로 소비된 대표적인 콘텐츠인 ‘시커먼스’가 있다. ‘시커먼스’는 1987년 KBS 대표 프로그램 ‘쇼 비디오자키’의 정규 프로그램이었는데, 코미디언 장두석, 이봉원 두 사람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곱슬머리나 레게머리 가발을 쓰고 등장했다. 그 코미디는 당시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힙합 비트에 맞춰 코미디 대사를 맞춰 부르는 형식을 갖고 있었는데,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코너의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흑인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하며 공연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몸짓과 태도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며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강화했으며 자신과 다른 피부색을 갖은 사람의 존엄성에 해를 입혔다. 1988년 ‘시커먼스’는 결국 동해 개최될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인종 비하 논란 예상으로 폐지되었다****.
물론 흑인이 아닌 사람이 흑인 분장을 하는 행위를 일컫는 <블랙 페이스(black face)>는 한국의 시커먼스가 시초는 아니다. 1830년대 익살극으로 시작된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는 점차 백인이 흑인으로 분장하고 뮤직 코미디를 하는 형식으로 변해갔는데, 당시 19세기 중반 남북전쟁이 끝난 미국에서는 흑인이나 인디언 등에 대한 차별이 불법이 아니었기에 이러한 형식의 공연은 전혀 문제가 되지도, 문제제기를 할 사람도 없었다. 그중 코미디언 토머스 다트머스 대디 라이스(Thomas Dartmouth Daddy Rice)가 연기한 ‘점프 짐 크로(Jump Jim Crow)’가 전국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라이스는 이 공연에서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몸이 불편한 흑인 노예 ‘짐 크로’의 동작과 사투리를 춤과 노래로 희화화했다. 이후 짐 크로와 함께 ‘블랙페이스’들로 이루어진 민스트럴 쇼가 인기를 얻게 되자 도시에서 온 오만하지만 어리석은 ‘집 쿤(Jip Coon)’등 또 다른 흑인 캐릭터도 생기는 등 쇼의 내용은 점차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쇼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거나 텔레비전 쇼를 통해 방영되며 남북전쟁 후의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출연자 대다수가 흑인 분장을 하고 우스꽝스럽게 과장된 행동을 하는 것이 쇼의 주 내용이었다는 것이었고 사람들이 쇼를 보고 웃고 즐기는 사이에 ‘짐 크로’는 흑인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타자들에 의해 기형적으로 변형되었고 점차 흑인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굳어지게 된다.
그 시절 인권감수성이 지금보다 낮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저 웃고 즐기자는 건데 혹은 농담이었을 뿐인데 그것이 큰 문제가 되겠냐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다. 종종 외국영화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옛날을 회상하며 “아 그때는 참 유머들이 짓궂었지! 그래도 그때가 참 재밌었는데”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짐 크로의 다른 면도 함께 들여다보아야 한다. 짐 크로는 한편,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던 미국의 주법을 일컫는다. 일명 짐 크로 법(Jim Crow laws)으로 불리는 이 법은 예전 미국의 남부 연맹이 있는 모든 공공기관에서 합법적으로 인종 분리를 가능하게 했다. ‘짐 크로’는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확산과 스테레오 타입의 고착화에 기여했고, 이에 더해 여전히 남부 경제를 지탱해 오던 ‘흑인 노예’를 잃고 싶지 않았던 백인 농장주들의 인식이 더불어져 ‘백인과 흑인은 동등할 수 없다!’라는 법이 제정되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짐 크로 법은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이라는 슬로건으로 백인과 흑인을 분리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흑인들은 짐 크로법(흑백 분리법)에 지속적이고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흑백을 분리하는 것은 쉬웠으나 다시 통합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지지 부단한 과정이었다. 그동안 흑인들은 백인들과 같은 좌석에 앉을 수도, 같은 음수대를 사용할 수도, 그리고 심지어는 같은 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다. 1964년이 돼서야 제정된 시민권 법을 통해 드디어 89년 만에 흑인들은 법적으로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짐 크로우의 그림자는 아직도 미국에 어른거리고 있다. 2020년 미국은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또 한 번 떠들썩 해졌다. ‘Black lives Matter’의 슬로건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독일에 살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한국 뉴스보다 독일 뉴스를 많이 보고 한국 방송보다 독일 방송을 많이 보게 되면서 ‘서양’ 매체에 실제로 아시안 클리셰(Asia-Klischee)들이 널리 퍼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티브이 속의 동양 배우, 동양인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 또는 동양인에 대한 이슈를 다루는 미디어, 심지어 만화 속 동양인의 캐릭터들은 주로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동양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면 동양인의 특징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굳이 ‘동양인’ 캐릭터가 있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중 ‘아시안 클리셰’가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곳은 만화또는 애니메이션이다. 만화는 그 매체의 특성상 과장과 희화화가 잘 보이기 때문이다. 서양 매체에 등장하는 동양인 캐릭터는 주로 찢어진 눈 또는 노란 얼굴로 그려지며 ‘수학 또는 게임을 잘하면서 수줍거나 비열한 성격을 갖고 있으며 대체로 부모님의 간섭을 받는 처지에 놓여있거나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게끔 묘사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부분의 동양인 캐릭터들은 서툰 영어를 구사한다. 예를 들어 아메리칸 대드(American Dad)의 토시는 일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한데 다 모아놓은 캐릭터라고 볼 수 있는데, 토시는 영어를 알아듣지만 늘 일본어로 이야기 대답을 한다.
이러한 아시안 클리셰들은 서양의 미디어에 수없이 등장했고 또 재생산되고 있다. 근래 들어서야 동양인이 주체적으로 서사를 풀어가는 모습들이 서양 매체에서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동양인은 늘 우스꽝스러운 감초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아시안 성’을 재생산하는 역할에 그쳐야만 했다. 특히 영화 <행오버> 시리즈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를 통해 유명해진 한국계 미국 배우 켄정은 할리우드 영화 속 아시안 클리셰를 재생산하며 동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굳히는데 일조하고 있다. 켄정이 스탠드업 코미디 쇼에 올라 부모의 ‘아시안 성’을 희화화할 때 그가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농담으로 이질적인 두 문화를 융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수준 낮은 농담으로 두 문화의 이질성을 강조하고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할 뿐이다.
독일에서 생활한 지 8년 차에 접어드니 점차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태도가 바뀌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처음에는 경악했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익숙해졌으며 나중에는 함께 체념하여 자조적으로 웃게 되는 것이다. 점차 매체에서 보여주는 아시안 클리셰에 무뎌지면서 이내 스스로의 마음 한편에 ‘그래, 동양인들이 이런 모습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하는 생각의 씨앗이 심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체념한 채 그들과 함께 웃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근 콜롬비아의 한 방송에서는 BTS의 명성을 깎아내리려는 듯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이에 분노한 팬들이 항의를 하자 일본 유명 만화 드래곤볼의 가발을 착용하고 욱일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나타나 사과를 하였다*****. 또한 미국의 수집용 일러스트 카드 제작사에서는 BTS를 그래미 트로피에 얻어맞는 두더지의 모습으로 묘사하며 인종차별적 논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지난 2021년 9월에는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1차전을 앞둔 이라크 축구팬들이 손흥민 선수를 포승줄에 묶은 합성사진을 만들며 한국 팬들을 불편하게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공통점은 아마 인종차별적 의도를 유머라는 포장지로 감싸 표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종차별적 메시지에서 나오는 악취는 수준 낮은 유머를 금세 뚫고 나왔고 이는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만 만들 뿐이었다. 세계무대에서 동양인들 또한 여전히 “Stop hate Asians”을 외쳐야 한다. 그리고 동양인에 대한 무시와 혐오 감정을 키우는 것에 아시안 클리셰를 통한 농담들이 무의식 중에 한몫했음은 자명해 보인다.
로마의 국가 원수이자 최고 책임자,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 자리를 맡았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능변가이자 만담꾼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저자로 잘 알려진 플루타르코스는 키케로의 전기를 쓴 작가이기도 한데, 그는 자신의 글에서 키케로의 농담을 평가하기도 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때 두 가지 사실을 지적했는데 하나는 만담꾼과 정치인 사이에는 얇은 종잇장 정도밖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유머에는 모호성이 있어, 누군가와 같이 웃는 것과 누군가를 비웃는 것 사이의 구분이 어렵다는 점이다.
유머는 고도의 이성적 사고에 기반한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는 축복이다. 우리는 유머를 통해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사고의 전환을 할 수도 있고, 서로 간의 심리적 거리를 좁힐 수도 있다. 유머는 잘 쓰이면 척박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되지만 잘못된 유머, 적절하지 않은 농담은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상대의 문화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강화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키우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나쁜 농담을 방조하고 깊은 사고 없이 함께 웃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조롱의 대상이 된 상대방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어떤 농담에 웃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사람됨을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한다. “농담은 농담일 뿐”이라는 이야기야 말로 참 웃기는 소리이다!
*[장미의 이름] - 움베르크 에코, 열린 책들, 2009.
**[어떻게 재치 있게 농담할 것인가]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아날로그(글담), 2022
커버 사진: 올리버 브라운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에서 피부색을 이유로 학생들의 교육을 분리하거나 차별하는 것이 위헌이라고 판결이 나자 그에 대항하여 시위를 하는 백인 학생들, Students from Clinton High School protest court-ordered integration after the Brown v. Board of Education decision ruled segregation laws to be unconstitutional. Clinton, TN, 1956, 링크: https://www.reddit.com/r/HistoryPorn/comments/5hwy1u/we_the_pupils_of_this_school_dont_want_negr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