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를 인식하는 법과 인종차별
보통 ‘한국’에서 ‘한국인’이 스스로가 ‘한국인’이라고 자각하는 순간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섬과 딱히 다를 바 없는 한반도에서 나고 자란 한국사람들은 웬만하면 한국 부모와 형제 그리고 한국 친구에서부터 한국 원수를 갖고 있을 확률이 많기 때문이다. 최근에야 K문물을 이유로 한국을 찾거나 장기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늘었지만, MZ세대에 어중간하게 끼인 나조차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내가 대학을 입학한 때는 전설로 남은 팝스타 마이클 잭슨이 사망을 하고, 북한이 여러 차례 미사일을 발사하고 광화문 광장이 일반시민에게 공개되던 2009년이었다. 대학을 서울로 다니면서는 자연스레 외국인들을 자주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 빈도수는 그리 많지 않았었다. 게다가 만나는 외국인이라고 해봤자, 외관으로는 쉽게 국적을 구분할 수 없는 아시아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처음 독일에 입국했을 때 나는 마치 나도 모르는 새 누군가 나의 얼굴 혹은 등짝에 커다랗게 ‘한국 사람’이라고 써 붙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한국인이 많지 않은 곳을 여행해본 사람이면 공감을 할 수 있을 것이다(독일의 하이델베르크를 경유하는 유럽 투어 관광버스에 앉아있거나 보라카이의 한국 식당을 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선글라스나 마스크로 얼굴의 일부분을 가려도 나의 정체성은 쉽게 가려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나의 등판에 적혀있는 문구는 스스로는 ‘한국 사람’이라고 느끼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아시아인’ 일 확률이 높다. 외국에서 서로 눈만 마주쳐도 서로를 알아차리는 한국인들과는 달리 보통의 외국인들(주로 아시아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동양인들을 쉽게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니하오”, “곤니찌와”를 인사말로 건네는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 백이면 백 외국인 것도 이런 이유에 있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아이 엠 코리안!!”이라는 대답을 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외국에 와서야 비로소 한국인으로서의 강한 정체성이 생긴 것이다. 해외에 있으면 누구든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외국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꼭 듣게 되는 질문은 바로 “어디서 왔니?”이다. 그래도 지금은 ‘어디 나라 사람이니?’라고 묻지만, 과거 유럽에서는 “어느 민족, 어느 백성 혹은 어느 도시 사람이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국가’ 혹은 ‘나라’라는 개념이 15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 개념을 거쳐 근대에 와서야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심지어 ‘누구의 민족 혹은 백성인지’를 물으며 개인이 어느 영주의 소속인지를 따져 묻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의 예를 들자면 “어느 대감댁 종이냐?”라고 물었던 것과 같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현대에 와서 개인의 지위가 많이 격상되었다 해도, 출신 국가를 밝히는 것은 나의 정체성(Identität)에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출신 도시와 소속을 묻는 것의 토대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며 생존에 중요한 사고방식이 원인이다. 인간의 삶 자체가 범주적 사고(categorical thinking)인 범주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인식은 개체를 어떤 <카테고리> 또는 <범주>에 속하는지에 분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낯선 생김새를 갖은 이방인의 출신을 아는 것은 ‘이 사람은 A나라 사람이니 보편적으로 이러이러한 특성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겠군’하며 인식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게다가 ‘타인’이라는 범주는 인간의 인식 그 자체만큼이나 원초적이다.**
근대와 현대를 지나면서 확립된 국가 개념은 지금의 분류 기준을 확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더 나아가 정보 통신 기술에 대한 발달로 우리는 개별 국가에 대한 대략적이거나 선택적으로는 구체적인 정보들을 접하게 되었고(15세기의 보통의 조선 사람은 서유럽 국가들의 이름조차 몰랐으니) 이는 <국가별 고정관념>을 발달하기에 이른다. 예를 들어 ‘프랑스 사람들은 거만해’, ‘독일 사람들은 무뚝뚝해’ 또는 ‘일본 사람들은 속을 알 수가 없어’ 등 사람들의 성향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인도 사람들은 카레만 먹는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손으로만 음식을 먹는다’ 혹은 ‘러시아 사람들은 모두 술을 많이 마신다’처럼 특정 식습관에 대한 일반화 또는 고정관념이 생기기도 한다.
이처럼 인식에 대한 분류 외에도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분류를 한다. 손톱깎이를 거실 선반에 두어야 할지 침실 서랍에 두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분류이고, 세탁을 할 때 티셔츠를 수건과 함께 빨지를 결정하는 것도 분류이다. 게다가 컴퓨터 바탕화면의 놓인 수많은 파일을 어떤 폴더에 넣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우리의 <분류> 행위에 속한다. 큰맘 먹고 바탕화면 정리를 하는데 꼭 맞는 폴더가 없다면 우리는 ‘새 폴더’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이미 분류해 놓은 파일이 더 이상 해당 폴더에 맞지 않는 다면 우리는 재분류를 해야 한다. 컴퓨터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이다. 언어를 배우고 업무를 처리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거나 장소를 찾으며 우리는 매 순간 새로운 분류를 하게 되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이 모두 무뚝뚝한 것은 아니구나’, ‘프랑스에도 친절한 사람들이 많구나’ 또는 ‘이렇게 솔직한 일본인도 있구나!’ 등 기존에 갖고 있던 지식에 경험을 통한 새로운 발견 혹은 인식의 전환으로 우리는 고정관념을 재분류를 통해 고치거나 확장시켜 나가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이 <재 분류>를 멈춘 사람들을 만날 때이다. “한국 사람들은 김치만 삼시세끼 먹는다며?”, “한국에 곧 전쟁 나는 거 아냐?”등의 질문을 하는 사람들 혹은 자신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무례하게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하지만 이들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무턱대고 화를 내는 것은 성급하다. 이들은 정말로(믿기 어렵겠지만) 한국인을 처음 봤을 수도 있고, 한국에 대해 많은 정보가 없을 수도 있다. 당신을 마주친 이 순간 혹은 당신에게 조금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들의 머릿속에선 <재분류>가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 무대에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한편으론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종종 잊고 살지만, 한국 전쟁 후 불과 70여 년 밖에 흐르지 않았고 실제로 한반도에는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우리는 종종 삼시세끼 김치를 먹기도 하지 않나. 따라서 한국에서 왔다고 이야기를 하자마자 전쟁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아! 저 사람의 뇌는 도대체 어느 시대에 멈추어 있는 것일까’하며 사뭇 진지하게 걱정을 하기도 하지만 이내 나 또한 그러지 않았나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우리는 대체로 서구의 역사와 최신 뉴스들을 아프리카나 아랍 국가의 소식들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접하면서 자라왔고 살고 있다. 따라서 나 또한 독일 어학원에서 불가리아, 코소보, 남아프리카 공화국, 체코 등의 학생들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 나라들에 대한 기본 정보조차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과는 대화가 가능하다. 한국 사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당연히 김치를 자주 먹는다고, 북한과 휴전 중이지만 일상에서 직접적인 전쟁의 위험을 느끼는 것은 너희들이 걱정하는 것과는 정도가 다를 수 있다고 설명을 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나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과 고정관념을 나쁘게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모욕하는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칭챙총”, “너 개고기 먹지?” 또는 “김정은 네 친척 아냐?”등의 발언을 하거나 앞의 글에서 언급했듯 째진 눈(Schlitzaugen)의 손 모양을 하는 것은 분명히 후자에 속한다. 이런 언행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 모두는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다>라는 아주 간단한 명제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거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 즉 타자에 대한 이해력과 포용력이 없는 것일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자신의 책 [제2의 성]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타자성은 인간 사고의 가장 기본적인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집단도 타자를 정의하지 않고서 자신들의 집합을 ‘우리’라고 규정할 수 없다. (…) 한 나라의 주민들에게 다른 나라 사람들은 <타자>이다.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유대인은 <타자>이며,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겐 흑인들이, 식민통치자들에겐 원주민들이, 유산자들에겐 무산자들이 바로 <타자>이다.”
우리가 아닌 타자를 인식하고, 분류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생존을 위한 기본 토대이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정의와 태도가 왜곡되어 있는 사람들의 자기 정체성은 단연코 건강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타자와 낯선 것들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우리와 타자를 공격적으로 또는 급진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과도 맞지 않는 선택으로 보인다.
*[라틴어 수업] - 한동일, <Lectio. XXII - 한국 사람입니까?>
**[제2의 성] - 시몬 드 보부아르, 독일어 판 [Das andere Geschlecht - Sitte und Sexus der Frau], 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