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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Jan 04. 2022

독일의 미세먼지

일상 속 불편하고도 불쾌한 그것

독일에 살면서 누리는 가장 큰 기쁨은 이곳에는 미세먼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어느새부턴가 한국에는 황사에 이어서 미세먼지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한국 사람들은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부터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 돼버렸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외출 후 칼칼한 목과 까만 먼지가 묻어 나오는 코가 그날의 미세먼지 농도를 알려주기도 했다. 독일에서 나의 일상은 아침에 일어나 온 집안을 환기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문을 열면 신선한 공기가 집안을 채워주고 자연의 풀내음이 가구 사이를 메워준다. 이 소소한 기쁨은 공기청정기가 필수였던 한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다른 종류의 먼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먼지 차별>이라고 불리는 ‘micro aggression’이다. 차별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아주 사소하지만 공기처럼 일상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차별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 사람에게 먼지 차별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지만 차별을 받는 사람에게는 마치 매캐한 공기가 오장육부를 지나 마음속 한편에 켜켜이 쌓여간다. 그에 비해 미세먼지는 부자와 빈자, 외국인과 내국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피해를 주니, 공평함에 있어서는 미세먼지가 먼지 차별보다 낫다고도 할 수 있다.  


차별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 <먼지 차별>은 마치 미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차별받는 이가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마치 오컬트 신앙을 믿거나 구태연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사람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이 먼지 차별을 잘 나타낸 시리즈로는 넷플릭스의 ‘콜린 인 블랙 앤 화이트(Colin in Black and White)’가 있다. 콜린은 백인 가정에 입양된 흑인 남학생이다. 그는 백인 부모와 함께 유독 흑인이 적은 동네에서 자라게 되었고 어릴 때부터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터라 점차 성장하면서 풋볼팀의 ‘쿼터백’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된다. 그러나 콜린은 보통 백인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쿼터백’을 맡고 싶다는 꿈을 꾸면서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로 가득 찬 공기를 마시게 된다. 이 시리즈가 유독 흥미로웠던 점은, 이 이야기가 실제 풋볼팀에서 쿼터백 선수로 활동했던 콜린 캐퍼닉(Colin Kaepernick)의 실제 경험담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콜린은 같은 팀 선수들과 정기적으로 열리는 풋볼 연습 캠프에 참여하는데,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스낵을 콜린도 받으려 하자 스낵을 나누어주던 백인 아주머니가, “얘, 너 내가 아까 받는 것 봤어. 너에게 또 줄 수 없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어서 그가 그의 부모님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캠프 담당자가 다가와선(우연히도 담당자는 이번에도 백인이.) “혹시 이 학생이 당신들을 귀찮게 하나요?”라고 묻기도 한다. 게다가 흑인 학생들로만 구성된 풋볼팀이 캠프에 입장하자 관계자는 득달같이 달려와 “이번에도 소란스럽게 굴면 쫓겨날 줄 알아!”하고 말하는데, 그 바로 옆에선 백인 풋볼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고 있지만 그들에게 주의를 주는 사람은 이상하게도 아무도 없다. 시리즈의 내레이터로 직접 출연한 콜린 캐퍼닉은 이를 ‘micro aggression’이라 정의하며, 이는 아주 미세해서 막상 다른 사람에게는 설명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 시선, 제스처, 뉘앙스 그리고 단어 선택에도 녹아있으며 차별받는 이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보다 조금 더 직접적인 차별 방식도 있다. 독일에서는 아시아계 사람들의 눈을 종종 ‘Schlitzaugen(실눈 혹은 째진 눈)’이라고 한다(‘Schlitz’라는 단어는 독일어로 길쭉한 모양의 작은 입구를 뜻한다). 물론 이것은 굉장히 인종차별적인 표현으로, 흑인들을 ‘Negar’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를 독일에 7년 가까이 사는 동안 한 번도 직접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최근 이 단어를 비로소 연달아 듣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 번은 남편의 친한 친구로부터 였다. 대화 도중 그는 두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눈에 가져다 대며 정확히 ‘Schlitzaugen’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바로 “너 인종차별 주의자야?! 왜 내 앞에서 그 표현을 쓰는 거야?”라고 되물었다. 평소 그는 나와도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라 분위기는 나빠지지 않았고, 우리는 웃으며 바로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다. 두 번째로는 최근 크리스마스이브날에 남편의 가족을 만나러 남편의 누나의 집을 찾았을 때였다. 자주 만나는 남편의 가족들만 올 것이라 예상지만, 그 자리에는 일 년에 한두 번 만날까 싶은 남편의 친척이 한 명 더 와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나는 홀로 거실에 피워놓은 난롯가에 앉아 나른한 기분으로 불을 쬐고 있었다. 남편은 9살짜리 조카와 신나게 축구 게임을 하고 있었고 시부모님과 누나는 부엌에서 미처 다 먹지 못한 오리고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슬며시 나의 곁으로 다가온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지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인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닌 듯했으나,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지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중대한 의무라도 되는 양 다짜고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용은 사실 그녀 지인 중에 나처럼 아시아 출신으로 독일에 시집와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갑자기 이야기 중간에 그녀는 두 손을 자신의 눈가에 가져다 대고는 두 눈을 양 옆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걔도 이렇게 생겼어.” 태연하게 인종차별적 행동과 말을 하는 그녀의 태도는 나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지만,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린 나는 남편 가족의 친지와 얼굴을 붉히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오늘은 성스러운 크리스마스 아닌가! 나는 난로에서 조용히 타들어가는 나뭇 토막에서 시선을 그녀에게로 옮긴 후 침착한 태도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녀가 ‘asiatische Gesichtszüge(동양 사람 같은 생김새)’를 가졌다는 거지?” 그녀는 언짢아하는 나의 반응은 전혀 지각하지 못한 채 오히려 신이 나서는 대답 했다. “그래, 째진 눈(Schlitzaugen) 말이야!”


그제야 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내가 모르는 새, 어느 국제단체에서 ‘아시아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두 눈을 양 옆으로 잡아당겨야만 한다는 법’ 또는 ‘아시아 사람에 대한 인종차별적 희롱은 처벌과 제재의 대상이 되지 않음’이라는 법이 제정되기라도 한 게 틀림없었다.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디지털 세대의 시민답게 이 불쾌한 단어의 어원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번째 페이지에서 ‘Warum haben Asiaten Schlitzaugen/mandelförmige Augen?’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글의 저자는 글의 어미에 분명히 ‘Schlitzaugen’이라는 용어는 인종차별주의적 용어라는 것을 밝히고는 아시아인의 눈에 대한 편견과 질문들에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시아인들이 눈의 모양새나 좁은 미간으로 인해 시야가 좁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이야기하였다. 아니, 놀랍지 않은가? 실제로 아직도 유럽인 혹은 독일인 중 몇몇은 동양인의 시야가 서양인보다 좁을 것이라고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동양인의 눈의 생김새는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유전적 변화에서 야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하며 글을 마쳤다. 스크롤을 마지막까지 내린 나의 기분은 어쩐지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그 외 Schlitzaugen에 대한 연관 검색어로는 실제로 ‘동양인들은 시야가 좁나요?’, ‘중국인도 속눈썹이 있나요?’와 같은 것들이었다. 인터넷은 정보의 보고뿐만 아니라 수준 이하의 사람들이 자신의 무식함을 익명으로 드러내는 대나무 숲이 분명하다는 생각과 함께 한숨을 푹 쉬며 노트북을 닫았다.


결국 나는 정공법을 택했다. 그것은, 그 단어와 제스처를 취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일 년에 두 번 만나는 남편의 친척을 다시 만나기엔 다시 반년을 기다려야 했으므로 나는 하는 수없이 남편의 친한 친구에게 만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굳이 따지자면 인종차별적 용어가 맞지만,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Alltag Rassismus’에 불과하며 딱히 공격적인 의도를 담지는 않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 자신도 이민 배경을 갖고 있으며 비슷한 종류의 Alltagsrassismus(일상 속 차별)과 끊임없이 마주치며 자랐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그에 대해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로 무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이 맞다. 일상 속 차별은 단연 아시아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Schlitzaugen은 아시아인의 외모를 비하하기 위한 아주 단적인 예일뿐이다. 독일 국민 중 4분의 1은 이민 배경을 갖고 있거나 외국인이다. 쉽게 말하면 독일에서 길을 걷다 만나는 사람 중 4명 중 한 명은 이민 배경을 갖고 있거나 외국인이라는 이야기이다. 이곳에서 차별의 모습은 독일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만큼 다양하다.


그럼 우리는 우리를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차별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관용과 유머로서 넘겨야만 하는가? 그것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일상 속 차별이 퍼져나가는 것을 방관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우리의 아이들이 그 단어와 그 단어를 쓰는 사람들에 상처받는 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가해자는 없지만 피해자는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해야만 하는가?  


결론을 내리기 위해 나는 며칠간 스스로와 인터넷 속의 타인에게 그리고 주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주제에 대해 물어보었다. 모두의 의견은 예상했던 대로 같지 않았고 나는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수없이 질문을 하는 도중 나는 내가 이미 답을 찾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상 속 차별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응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 질문의 대상은 첫 번째로 그 단어를 사용한 당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정확히 무슨 의도로 그 단어를 사용했는가? 이 단어가 인종차별적 단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가? 상대가 그 단어를 모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다음으로는  그 단어를 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모두가 이 단어를 스스럼없이 사용한다고 해서 납득해야만 하는가? 나 또한 일상 속에서 비슷한 인종차별적 언어 습관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차별의 대상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일 경우 나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외에도 질문의 종류나 내용은 달라질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 움베르트 에코는 컬럼비아 대학의 심포지엄에서 ‘언어 습관은 종종 표현되지 않은 감정들의 중요한 징조가 되기도 한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무의식 중에 사용되는 인종차별적 언어습관의 감시를 통해 내재된 개인과 사회의 감정의 샘을 정화하는 것은 차별에 대항하는 중요하고 기본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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