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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kaya Lee Feb 18. 2016

오렌지 썩는 내 흐드러지는

도시를 걷다 - #10 Sevilla





때때로 어떤 기억은

오롯이 특정 '향기' 속에서 잊지 못할 추억으로 치환되곤 한다.


프루스트Proust 소설 속 주인공의 유년 시절을 되돌린 '마들렌'의 감미로움이,

비단 마들렌 조각을 깨물어 삼키던 입술의 기억뿐이었으랴. 필시, 아니 거의 틀림없이,

따끈한 홍차 한 잔과 곁들여진- 라벤더 혹은 레몬 내 품은 보송한 빵의 달콤함과 더불어

코끝에 스미는 향내와 함께- 였으리라, 생각한다.


냄새라는 매개체는 예상 이상으로, 꽤나 강력한 것이어서,


배곯은 오후, 낯 모를 골목을 헤매다 문득

금 가고 낡은 부우연 유리창 사이로 새어나오는

쌀밥 안치는 냄새 혹은 나물 조근조근 무치는 기척,

귀 끝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쨍한 겨울날

거리 끝 군밤장수(어느 나라에나 있다)의 장작 탄내와 눌은내,

설탕 입힌 땅콩 볶음과 카레맛 고로케의 기억 따위가 있는 이들이라면


그때 그 거리의 흥취와 분위기를 돌이켜주는

기억 끝자락 '냄새'의 역할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기 쉬울는지 모른다.





무수한 오렌지들이 주렁주렁 나무 위에서 썩어문드러질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샛노란 기운 뿜어대던 어느 작은 도시 속에서

매일같이 길을 잃고 목적을 잃고 방황하던 때













무심하리만치 너른 광장은

여느 연인들의

속삭임과 값싼 추억, 

소란스러운 말싸움, 

눈먼 낙타들의 짝짓기 같은 굼뜬 몸짓과

서투른 호감 등을

텅 빈 공간 구석구석에


감춰주고 있었고,













동방의 갖가지 금은보화와

터번 둘러 쓴 이들의 큼직한 반월도,

산적과 해적과 바다괴물 이야기,

고양이 눈알만큼 영롱한 사파이어와 토파즈,

초콜릿색 살결의 노예들

무수한 노역과... 바나나 농장, 페르시아 말들,

연인을 잃고 절벽 위에서 몸을 던져

가을 밤하늘 별자리가 되었다던

한 처녀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직 살아 넘실거리며 전해지던-


전해졌던

그런 도시






























정처없이 발걸음을 옮기다가,


굵직한 시가cigar의 형상과 이름을 그대로 본땄다던- 가게 제일의 추천 메뉴는

짭조름한 오징어 먹물 냄새와 보드라운 유백색 크림이 입속에서 넘실거려

한순간에 혼자라는 외로움을 잊게 만들었다.

오징어 살을 함께 갈아 넣었는지 오물조물 씹히는 맛과

기름솥에 가볍게 튀겨낸 피의 바삭한 절묘함에 흐응, 절로 콧노래가 나와

기분 좋게 차가운 샹그리아 한 잔을 추가했던 조촐한 식탁.













구운 호두와 아몬드 가루를 흩뿌린

다디단 케이크와


진-한 커피도 빠뜨릴 수 없고











































두터운 벨벳 천을 드리운 보석 가판대를 장식한

여신들의 춤사위와


인공눈물 같은 반짝임








































한낮의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분주한 속삭임


오렌지 향내 스며드는 도시 속에서,

철저하리만큼 나 하나만 홀로라는 사실이

사뭇, 절절했다.













문을 연지 근 한 세기가 넘어간다는

오랜 과자 가게는

페도라를 눌러쓴 영감님들과

눈처럼 흰 스타킹을 갖춰 신은

백발 할머님들의 모임으로

분주하고,


황갈색 설탕으로부터 빚어진 달콤함,

염소젖 크림의 농후함은 여전한지
















삶이란 그저 누구에게나 

전통의 과자 맛처럼 달착지근하거나

꼬숩거나


영 공평하지만은 않은갑다.










































겨우내 성당 앞 광장에 꽉꽉 들어선

'크리스마스 마켓'은

비슷한 그저 그런 물품들을 파는 것 같지만

단 하나의 품목조차 꼭 같은 가격표를

달고 있으라는 법은 없다.





































































콧속으로 스미는 향내가 무색하게도




행여나 탐스럽기 그지없는

오렌지를 한 차례 공짜로 맛볼 요량이라면

일찌감치 그 생각을 접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건, 진지한 충고다.

오렌지에 대한 감미롭고, 새콤한 향미를

기억 한편에 간직해두고 싶다면















그리고 마침내

무수한 오렌지나무들이 뒤뜰을,

가득 메운 채      

찬란한 햇살 속 검은 돌들과 노닥거리는

성당에 다다르면


주홍빛 도시 산책은 대강

마무리가 되는 듯하다.














'옴폭옴폭 들어간 두꺼운 껍질의

통통한 스페인 오렌지

미세한 알갱이처럼 오톨도톨한 핏빛 껍질에,

자르면 자주색 속살이 드러나는

남부산 오렌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는 듯,

어머니는 오렌지 진열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 Five quarters of the Orange

                              /Joanne Harris













그리 거대하지도

유달리 작지도 않은 이 도시는,

야자수 잎사귀 바람에 꿈틀대는 소리와

낡고 지친 흙벽돌 냄새가 난다.













고즈넉한 소도시를 가득 채운

오렌지 행렬의 비밀 아닌 비밀은

그 맛이 끔찍하리만치 비극적이라는 것인데,

'여우와 신 포도' 우화를 절로

떠오르게 할 만큼이나


시고 떫고,

씁쓸하며 물컹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빛나는 아름다움만큼

그 속도 또옥, 같이

늘 반짝이진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알 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니?


일러준 것은

누구였더라

곱씹는다

사소한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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