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스키를 배우고 있다. 배우고 보니 스키는 탈 수 있냐 없냐의 이분법적 문제가 아니었다. 더 좋은 자세를 만들기 위해 정교하게 수정해가는 끝없는 과정이다. 처음엔 A자로 내려가고, 점점 더 일정한 곡선의 턴을 그리고, 속도를 높이고, 브레이크를 잡고, 다음엔 11자로, 다음엔 카빙으로, 숏턴, 롱턴, ...
'성장'과 '역경 이겨내기'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내심 즐기는 변태 같은 나에게 끊임없이 다음 단계가 있다는 건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스키를 처음 탈 때 무서운 게 있다.
넘어지는 거다. 넘어진다는 것에 대해 사람마다 정도와 결이 다른 두려움을 느끼겠지만, 일단 아프다. 그리고 창피하다. 초보자에겐 넘어짐 이후 혼자 일어나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리고 자주 넘어지다 보면 급격한 체력 저하가 찾아온다.
나는 훌륭한 호랑이 선생님을 곁에 둔 덕에 빠르게 초보 딱지를 떼는 중이다.
그런데 지난주 일행 중에 스키를 처음 배우는 분이 등장했다. 밥을 먹으며 들어보니 그분의 고민은 '넘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작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넘어지지 말아야지를 속으로 백번쯤 되뇌며 덜덜 떨고 있던. 사실은 지금도 열 번쯤은 되뇌긴 한다. 일어날 줄 알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 용을 쓴다.
타인이 스키를 처음 배우며 넘어지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왜냐하면 그게 실수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배울 땐 당연히 자주 넘어지는 거지, 오 잘하고 계시네'
'지금 저렇게 다리에 힘을 주는 건 당연하지. 자세 잡다 보면 곧 힘 빼고 타시겠네'
(그치만 나도 아직 잘 타는 건 아니라서 혼자 속으로만 생각했다. 가소로워 보일까 봐...)
그러니까 하고 싶었던 말은, 넘어지는 건 스키를 잘 타기 위한 순서를 밟고 있다는 것이다. 실수가 아니라 제대로 된 순서.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거다. 스키를 잘 타겠다는 목표로 가는 길에 잘못된 방향이 있다면, 그건 오직 스키를 안 타고 있는 순간이지 않을까? 넘어짐과 잘못된 자세가 두려워서 그저 슬로프만 바라보고, 저긴 어렵겠군, 하고 분석하고 있는 순간 말이다.
스키를 인생에 비유하자면 '도달'이라는 게 없다. 성장해나가는 과정 중에 자격증을 딴다던지, 멋진 영상을 찍어 주변에 자랑을 한다던지 하는 보상은 간혹 뒤따르지만, 그 어떤 보상도 '도달'이거나 '목표'는 아니다.
달콤한 보상의 순간 이후에도 우리는 그저 스키를 탈뿐이다. 다시 넘어지고 새로운 자세를 배우며 스키를 타는 거다. 마치 유재석이 대상을 여러 번 타고도 계속 부캐를 만들며 열 일하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스키를 탈 때, 플레이트 위에 올라탄다는 표현을 한다. 나는 내 인생의 플레이트 위에 올라탔는가? 혹시 슬로프를 보며 어디에서 넘어지면 아플 것 같은지 분석하면서, 스키를 탄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나? 혹은 넘어지는 게 두려워 슬로프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가?
아무리 철저히 준비를 해도 넘어짐은 피할 수 없다. 그냥, 플레이트에 올라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