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손을 사랑한 마녀
솜털이 보송한 그녀 메데이아 공주의 복숭아빛 뺨이 좀 더 붉어졌다. 그녀뿐만 아니라 많은 인파가 바투미 항구에 도착한 거대한 목선인 아르고호를 보려고 모여들어있었다.
바투미항에 도착한 거대한 목선 아르고호에서 눈부신 외모와 체격의 그리스 영웅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아이돌급 승선 멤버들의 목록을 살펴보자면,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 아스클레이피오스, 펠레우스, 악타이온, 아드메토스, 멜레아그로스 등이다. 신들의 사랑을 받은 뛰어난 능력으로 이미 여러 전투에서 눈부신 성과를 올린 그들이었다.
"그들이 왜 우리나라 콜키스에 왔을까?"
바투미가 배를 정박할 수 있는 조지아 서부 해안 도시라는 점에서는 이해가 간다. 그리스에서부터 배를 타고 왔으니 흑해 연안 도시 바투미를 목적지로 했겠지. 육지에 내려 그들이 하려는 일은 무엇일까?
호기심 어린 군중들은 영웅들이 지나갈 수 있게 길을 터 주면서도 뒤를 따라오며 수군거렸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들의 맨 앞에는 이아손이 앞장서고 있었다.
이아손은 콜키스 왕궁의 왕인 아이에테스를 접견하고 왕국의 보물인 '황금 양털'을 가지러 왔노라고 말한다.
그는 삼촌에게 빼앗긴 왕좌를 되찾기 위해 이 보물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황금 양털은 콜키스 왕국에서도 중요한 보물이었기에 아이에테스왕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다. 콩쥐에게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는 심부름을 시킨 팥쥐 엄마처럼 왕은 이아손에게 두 마리 괴물 황소에게 쟁기를 매어 밭을 갈고, 용의 이빨을 밭에 뿌리면 보물을 주겠다고 한다.
전투력이 뛰어난 그리스 영웅들이 이아손을 도왔지만 미션은 도저히 성공할 수 없었다. 이때 조지아의 낙랑공주가 나타난다. 사랑을 위해 나라를 지키던 자명고를 찢어버린 그녀처럼, 아이에테스왕의 딸 메데이아는 마법을 사용해 황금 양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뿐만 아니라 도망치다 잡힐 것에 대비하여 남동생을 인질로 데려갔다가 죽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남편 이아손의 배신으로 끝나버린다. 사랑을 위해 나라와 가족을 버린 그녀는 분노로 인해 분홍빛 뺨이 새빨갛게 되고, 눈빛마저 핏발 선 검 붉은색이 되어 복수를 다짐한다. 자신의 아이들과 이아손의 새 신부 글라우케 공주마저 죽여버린 그녀는 고향 콜키스로 돌아가서 마녀로 지배자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와 비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온다.
* 황금 양털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보이오티아의 왕 아타마스와 구름의 님프 네펠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아버지가 재혼한 이노는 전 부인의 자녀인 프릭소스와 헬레를 죽이기로 한다. 네펠레는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황금 양을 보내고 프릭소스와 헬레는 양의 등을 타고 날아서 도망친다. 여동생 헬레가 어지럼증으로 빠져 죽은 바다는 '헬레스폰토스'라 불린다. 프릭소스는 간신이 콜키스 왕국에 도착하고 그를 신이 보낸 선물이라 여긴 아이에테스왕의 사위가 된다. 이때 타고 온 황금 양의 가죽과 털은 잠들지 않는 용이 지키고 있었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바투미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이층으로 된 기차는 낡은 기차 역사와는 달리 넓고 쾌적했다. 먹거리 자판기나 삶은 계란 실은 카트가 없는 대신 챙겨 온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 우린 샌드위치와 생수 한 병씩 챙겨들고 기차 여행을 했다. 하지만 와이파이 없이 견디는 심심함에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먹어치워버렸고, 그다음 할 일이 없었다. 일행과 수다를 떨기엔 각자 자리가 떨어져 있고, 다른 승객들이 모두 조용한 편이라 대화를 나눈다는 것도 꺼려지는 상황이었다. 내 손에 스마트폰은 무용지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화라도 다운로드해 올 것을. 읽을만한 종이책이라도 가져올 것을'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이내 싫증 났다. 눈을 힐끔거려보니 '이럴 수가!' 어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의 키를 가진 아이와 함께 여행 중인 옆자리 여성은 엄마라고 하기엔 너무 날씬하고 젊다. 하지만 아이를 끌어안고 재우는 모습에서 엄마라고 짐작해 본다.
인스타그램을 검색하길래 어느 통신사 유심을 쓰는지 물어봤다. 한국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나는 혹시나 손님에게 연락이 올까 봐 유심, 이심을 모두 구입했다. 그런데 카톡이니 인터넷 검색이니 전혀 되지 않아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저렴한 일회용 이심 구매 사이트를 설명해 줬다. 하지만 시도한 대로 되지 않아 포기하고 앉아있으니 자신이 핫스팟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엄마를 찾는 아들과 끌어안고 자다가 깨면 핫스팟이 유효한지 물어봐 주었다.
나에겐 너무나 절실한 도움이라 감사 표시를 하고 싶은데 마땅히 줄 것은 없어서 후일을 도모해 볼 겸 인스타맞팔을 제안했다. 흔쾌히 허락하여 그녀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는데 평범한 사진이 아니었다. 그녀의 직업은 모델이었고 바투미에 있을 행사에 참여하려고 가는 중이라고 했다.
잠에서 깬 그녀의 아들은 기차 안을 돌아다니며 또래와 뛰어놀았고 나는 다행히 과자 한 봉지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주었다. 조지아에서 돌아온 후에도 업로드되는 포스팅을 보며 그녀의 커리어와 가족의 단란함을 응원하는 중이다.
마침내 바투미에 도착했다. "흑해는 과연 검을까?" 상상하며 캐리어를 끌고 내리는데 여러 명의 남성들이 흥정하러 다가온다. 택시와 관광버스 마슈르카 운전자들이다. 기차역은 바투미 구 도심에 있고, 우리가 머물 숙소인 신도시까지는 차로 이동해야 했다. 트빌리시에서 학습한 경험으로 꽤 괜찮은 가격으로 협상할 수 있었다. 택시 기사님은 유쾌했고 바투미를 즐기는 법에 대해 설명해 주려고 노력했다. 해변을 따라 달리는 택시에서 바다를 보니 서해와 비슷한 뿌연 불투명한 색이고 흑해라는 이름처럼 검지는 않았다.
숙소에 짐을 푼 우리는 각자 취향대로 돌아다니다가 시푸드 레스토랑에서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인근 바다에서 잡아올린 생선을 파는 피시 마켓에서 구입해가면 저렴한 비용 받고 구워주는 상차림 식당이었다. 흑해는 다양한 생선을 키워내고 시원하게 요트를 달릴 수 있는 운동장을 마련해 주고 있었다. 한때 경공업과 조선업이 활발했던 바투미는 이제 관광이 주요 산업을 담당하고 있다.
관광도시 바투미를 즐기는 데에는 하루가 모자라다. 조형물과 놀이시설이 갖추어진 해양공원과 광장에서는 다양한 액티비티가 가능하다. 바투미 공항에 내린 승객들은 카지노를 경험하고 골프를 치며 대형 식물원에서 산책과 짚라인을 즐긴다.
공원에서 특히 인기 있는 조형물은 '알리와 니노'이다. 아제르바이잔 이슬람 청년과 조지아 기독교 소녀의 미완성 사랑을 모티브로 한 작품은 절묘하게 움직이며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메데이아 동상도 있다. 그녀는 보물 황금 양털을 훔쳐 바투미를 떠나면서 남동생을 죽게 만들었다. 이아손의 숙부 펠리아스를 제거할 때는, 그의 딸들에게 독을 명약으로 속여 아버지에게 바르게 하는 간악함을 보였다. 바람피운 남편 이아손을 탓하며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기도 했다. 그리스신화에서 대표적인 악녀로 꼽히는 메데이아는 정말 그렇게 나쁜 마녀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