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연필
우리 집 연필들은 저마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가족 대항 부루마블을 한 다음 날. 점수판이 되었던 연습장 옆 연필은 여전히 심판의 기세를 품은 채 날이 닳지 않은 얼굴로 키 크게 누워있다. 언제든 다시 우리 식구의 순위를 매겨주겠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문제집 사이로 삐죽 얼굴만 내민 연필은 전날 아이가 쏟아낸 에너지를 고스란히 끌어안은 듯 나른하게 휴식을 취한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냈다는 자부심을 한껏 풍기면서.
그 옆 연필꽂이엔 아직 손이 닿지 않아 뾰족한 머리를 자랑하는 연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오늘은 누가 간택 받을 차례일까, 언제 연필깎이에 들어가 개운하게 몸을 한 번 씻어볼 수 있을까, 기대감에 잔뜩 들뜬 표정들이다.
그런 연필들 사이로 서글픈 얼굴 하나가 눈에 띈다. 아이들이 식사하고 떠난 자리. 식탁을 치우고 바닥에 무릎 꿇어 걸레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다리 사이에 존재도 미미한 몽당 연필 하나가 내 몸의 진동에 맞추어 힘없이 구르고 있었다. 낯익은 녀석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키가 컸었는데 어느새 땅꼬마가 되어 까까머리를 한 채 닳아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축 늘어진 모습. 자세히 보니 어젯밤 큰 아이가 다섯 페이지에 걸쳐 써 내려간 반성문에 온몸을 바쳤던 바로 그 연필이었다.
전날 저녁 거실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첫째가 칠판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동생이 애써 그린 그림을 허락 없이 지워버린 것이다. 각자 정해져 있는 영역이 있었지만 그 선을 넘어 욕심을 부린 것도 문제였다. 둘째는 울음바다가 되었고 첫째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될 일이었지만 외려 자존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말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그 뾰족함은 나에게까지 향했다. 엄마와의 대립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써야 하는 반성문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때 아이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했을까. 그 감정을 오롯이 안은 채 꽉 쥔 필압을 끝까지 받아 가며 옆에 있어 준 것이 바로 이 연필이었다.
저녁 무렵. 반성문을 쓰기 위해 노트를 펴고 책상에 앉은 아들이 날카롭게 나를 불렀다.
"엄마 연필깎이가 작동을 안 해. 왜 이렇게 안 깎이는 거야?"
화가 온전히 가라앉지 않았지만 더 이상 엄마에게 맞서지 않으려는 아이의 노력이 보였기에 말없이 새 연필을 꺼내주었다. 그때만 해도 스스로가 어디에 쓰일지 몰랐던 녀석은 기꺼운 마음으로 연필깎이에 머리를 들이밀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듬어졌던 풍채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폭삭 늙어 초라한 모습 될 줄이야.
아이는 끝까지 연필과 합심하여 반성문 분량을 채웠다. 연필이 짧아지는 만큼 아이 마음의 무게도 깊었을 것이다. 한없이 수척해진 녀석의 모습에서 정작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아이의 눈물 젖은 호소가 들리는 듯했다.
'내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동생 편만 들지 말고 제 맘도 좀 이해해주세요.'
모자란 엄마를 대신해 아이 곁에서 힘이 되어준 것 같아 괜스레 짠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녀석을 살포시 들어 올렸다. 아이 주먹보다 짧아진 길이라 더 이상 쓰임이 있을까 했지만 그래도 예쁘게 머리를 다시 빗겨주었다. 혹여나 친구들 옆에 넘어져 깔릴까 봐 연필꽂이 모퉁이에 조심스레 세워놓았다. 조금 전까지 볼품없어 보이던 녀석도 다듬어놓으니 제법 꼿꼿하고 단단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사명을 다하듯 뾰족해진 머리로 무언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아이가 나에게 기대던 만큼, 엄마에게 다가오면 힘껏 안아주세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