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사과
설을 보내고 집에 내려오던 길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화야 엄마가 갈비랑 튀김 해 놨는데 가는 길에 갖고 갈래? 아니면 온 김에 저녁에 세배나 하고 가라. “
친정은 우리 집에서 5분 거리이다. 오빠도 같은 아파트에 살아 자주 오가며 지낸다. 수시로 보는 게 친정 식구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나는 시댁, 오빠는 처가 위주로 명절을 보내게 되었다.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내고 산소에 다녀오는 길이라 몸도 마음도 피곤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빈손으로 갈 수도 없는데 준비된 건 없었다. 7시쯤 도착할 거라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당뇨가 있다. 과일을 정말 좋아하시지만 내키는 대로 드실 수가 없다. 그나마 혈당이 덜 오르는 게 사과라기에, 선물을 생각할 때면 늘 사과부터 떠올리게 된다. 설이 끝나가는 저녁 시간이라 문을 연 과일가게가 있을지 걱정되었다. 우선 시장으로 향했다. 명절의 끝자락을 알리는 듯 어둑어둑한 시장 안, 드문드문 불 켜진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사과 어떻게 하나요? “
"5kg짜리는 9만 원입니다. “
사과값이 금값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선물용이 아니라도 좀 작고 양 많은 사과 한 박스가 나을까 싶어 물어보니 그건 12만 원이란다. 앞니로 와그작 씹으면 즙밖에 남지 않을 고작 사과 앞에서 마음이 괜히 쪼그라들었다. 잠시 돌아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어두운 시장 안을 정처 없이 돌며 생각을 거듭했다. 용돈도 챙겨드릴 건데, 굳이 이런 비싼 과일을 사야 할까. 다른 과일이라도 조금씩 드시면 되지 않을까. 먹음직스러운 귤과 탐스러운 배에도 눈을 향해보았지만, 마음이 가지 않았다. 가격만 묻고 지나칠 뿐이었다. 가격의 무게보다 더 큰 것이 마음을 짓눌렀다.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고 사과 한 상자 냉큼 사 들고 나왔다.
초인종을 누르니 아버지가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셨다. 손주들의 세배를 받고 나니 부모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며 그동안 가볍게 넘겨왔던 명절 인사가 마음에 걸렸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무슨 사과를 이렇게 큰 걸 사 왔니? “
겉으로는 큰돈 썼다며 타박하는 듯했지만 그 속엔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묻어 있었다. 밤에는 과일을 드시지 않는 엄마가 선뜻 하나 먹어보자며 사과를 깎으셨다. 줄줄 깎여 내려가는 사과껍질이 춤추듯 활기차 보였다. 입안 가득 감도는 단맛. 사과를 베어 물던 엄마의 얼굴에는 당뇨도, 걱정도 없었다. 오로지 건강한 미소만 비칠 뿐이었다.
집을 나설 때, 엄마는 또 몇 개 남지도 않는 사과를 나눠 챙겨주셨다. 결국 나에게 돌아올 사과 앞에서 나는 그렇게 계산했었던 것이다. 넘지 못할 큰 산 같던 돈, 9만 원. 결국 고작 9만 원에 온 가족은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