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파인 땡큐, 앤드 유? (1)

10년을 살아도 못하는 영어, 도대체 뭐가 문제야? .

by 비비안 정
미국에 놀러간 한국 사람이 교통 사고를 당해, 큰 부상을 입었다.
얼마 후, 911이 도착했고 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 How are you?"
거의 죽어가던 그녀 입에서 나온 대답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 I'm fine thank you, and you?"

"OMG"



웃픈 이야기이다.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이라도 "아임 파인 땡큐, 앤 쥬?" 는 무의식 중에 불쑥 튀어나온다.

왜? 그렇게 달달달 외웠으니까. 그 이후로도 줄곧 무수히 많은 영단어와 원어민도 어려워하는 문법을 달달 외웠고, 그걸로 수능을 치뤘다. 나의 영어는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 했다.


허나, 인생이란 알 수 없는 법, 그래서 더 재미지고 살아볼 만 한 법인가, 내 나이 30살에 "아임 파인 땡큐"를 다시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난 도박을 안 좋아한다. 사실 할 줄 모른다. 그러니 재미도 없다. 그런 내가 인생을 건 도박을 하게 되었다. 바로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을 한 것이다. 그것도 사는 지역이 달라 첫 만남부터 결혼하기 만난 횟수가 10번도 안 되는 남자와 결혼을 해 버렸다. 그리고 3개월 후, 직장도 그만 두고, 비행기 타고 20시간이 걸리는 아! 맞다 중간에 뉴욕을 경유해서, JFK 에서 터미널 4번에서 1번으로 또 이동하고, 거기서 8시간을 대기하다 또 비행기를 타고 5시간을 가야하는, 그런데 티비도 없는, 기내식도 그냥 주는대로 먹어야 하는 캐리비안 에어라인을 타고 5시간을 가야하는 캐리비안에 있는 이름도 생소한 작은 섬나라 트리니다드 토바고로 떠났다. 그 전까지 내가 아는 캐리비안은 조니 뎁이 나오는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과 용인에 있는 캐리비안 베이가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세 번째 캐리비안을 만나게 된다.


인천공항에서 자랑스러운 대한항공을 타고 뉴욕 공항에 내릴 때까지, 아니 터미널을 옮기기 전까지 몰랐다. 경유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불안감이 조금씩 밀려왔다. '뭐지? 이 불편함은?'사람의 본능이란 참으로 경이롭다. JFK에서 내 운명을 스스로 직감해 버린 것이다. 5시간 동안의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내가 탈 비행기의 보딩이 시작되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현지인들 틈에서 쭈뼛쭈볏 겸손하게 밀려나고 밀려나 한참을 기다려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승무원과 눈을 마주칠 경우를 대비 중이었다. 내 표를 쓱 보더니 뭐라고 한다. 하... 큰일이다.



승무원이 나에게 대고 쏼라 쏼라 해대는데 못 알아 듣겠다. 아하하하하하, 미치겠다. 침착하게 귀를 열고 무의식에서 잠들어있던 리스닝 세포들을 표면으로 끌어올렸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다. 뭐 잠들어 있든, 깨어 있든 간에 달라질 게 없는 리스닝 세포였다. 하, 분명 영어인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영어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가 못 알아듣자 승무원이 저리 가라고 손짓으로 밀어냈다. 직감적으로 아직 내 차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착하게 다시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절대 나를 두고 갈 수 없도록 눈을 떼지 않고 게이트를 응시하고 있던 찰라, 다시 보딩이 시작되었다. 헉, 아까 그 승무원이다. 나를 보더니 다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쏼라쏼라 해댄다. 이번에도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까 했던 말이랑 같은 말이라는 것을, 역시 내 기억력은 죽지 않았다. 살짝 바닥에 있던 자존감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세 번째 보딩이 시작되었다. 줄을 서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4번을 반복하고 나니, 주변이 휑하다. 5시간 동안 함께 하지만 나와는 멀리 떨어져 대기하고 있던 대부분의 승객들이 이미 탑승을 해버린 것이다. 점점 불안해져갔다. '이렇게 탑승도 못 해보고 뉴욕 공항에 미아로 남게 되는 건가? 산더미 같이 챙겨온 내 이민 가방은 어떻게 찾지? 다시 한국으로 어떻게 돌아가지?' 온갖 걱정들로 머릿속이 가득차 터지기 일보 직전, 승무원이 다시 부른다. 너무 불안해서 울음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애써 침착한 척 다시 티켓을 내밀었다. 이제 나와 승무원 사이에 알 수 없는 익숙함마저 감돈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 아는 사이다.


아는 사이라 그런가, 이번에는 통과다. 나중에 알게 보니, 큰 비행기라 구역을 나누어 탑승을 진행했던 것인데, 그때는 몰랐고, 이제는 안다. 하, 감개무량하다. 난 정말 못 탈 줄 알았다. 머리를 쓸어올리는 척 식은땀을 자연스레 닦았다. 드디어, 날 용인에 있는 워터 파크가 아닌 진짜 캐리비안에 데려다 줄 비행기를 탑승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하지만 이내 지금까지 느꼈던 그렇지만 설명하기 어려웠던 불안함의 실체를 기내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다. 이 비행기에서 나는 유일한 동양인이다. 처음 느껴보는 색다른 낮설음을 여기서 경험할 줄을 몰랐다. 내가 옮겨다니는 곳곳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연예인이 되면 이런 기분일까? 아.. 심하게 부담스럽다. 내 아무리 주목 받는 걸 좋아할지라도 이건 아니지. 그렇게 가까스로 내 자리를 더듬 더듬 찾아 앉는다. 자리가 어둡다. 양 옆으로 풍만한 체형을 지닌 건강한 승객들이 나에게 그늘을 선사했다. 그래, 자외선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아 지금은 밤 시간이다. 나는 앞으로 5시간 동안 이들과 여정을 함께 해야 한다. 심리적 긴장감과 더불어 두 팔을 살포시 올려놓을 공간마저 사라지자 육체적 긴장감까지 더해졌다. 창가에 앉아 있는 건장한 승객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나 못 알아들었다. 나에게 몇 마디를 더 건냈지만, 나에겐 이제 그마저도 대응할 기력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대답 대신 입을 굳게 닫고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내 눈은 아마도 슬퍼보였으리라. 그런 내 마음을 알았다는 듯, 도착할 때까지 나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이륙 후, 안전벨트 비상등이 꺼지고, 기내 방송이 울렸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저 도착만 무사히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먼 곳을 응시하던 내 귀에 익숙한 영어 단어가 들렸다. 바로 "바게트"였다. 그렇다. 너무 긴장한 탓에 기내식을 잊고 있었다. 갑자기 귀가 뚫렸다. 기내식은 두 종류다. "피쉬, 블라 블라", "바게트" 였다. 하. 멈춰있던 뇌회로가 급가동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 만이던가! 이렇게 활기를 되찾게 되다니' 긴 고민 끝에 빵 대신 밥 같은 걸 먹고 싶은 마음에 피쉬로 결정을 내리고는 내 차례를 기다렸다. 드디어 마주한 승무원에게 메뉴를 말하려는 순간 내 테이블에는 밀박스가 놓여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같은 메뉴였다. 하... 또 잘못 들었나보다. 선택같은 건 없는 메뉴였다. 어쨌든 음식을 손에 쥐니,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뱃가죽이 등과 붙어버릴 것 같은 허기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생선이든 물고기든 불고기든 가릴 처지가 아니다. 거의 10시간 만에 마주한 음식 앞에 설레임이 폭팔하며, 바게트를 한 입 베어물었다. 와! 정말 놀라웠다. 뭐지? 이 형언할 수 없는 맛없음은? 있던 입맛도 달아나게 만드는 바케트 안을 살피자, 속에는 갈색을 띄는 죽같은 형체가 가득했다. '아.. 너였구나. 이런 맛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니!' 입안도 머릿속도 얼얼했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 기내식을 남겨본 적이 없는 나였다. 같이 탄 일행이 맛없다며 남겨도 나는 뭐든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기내식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이건 정말 차원이 다르다. 허기짐은 먹으라 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승무원이 갑자기 내 샌드위치를 멋대로 회수해 간다. 하, 이제는 황당하지도 않다. 그리고는 강제 취짐을 알리듯 기내안의 조명은 꺼졌다. 그런데 정말 다 꺼졌다. 어둠 속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흑인들을 처음 보았다. 안 보인다. 정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던 블랙 프라이데이가 아니었다. 내 머릿속은 블랙홀 속으로 빠져버렸다. 소등 후 30분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 멀뚱 멀뚱 올빼미마냥 눈만 뜨고 있으려니 견딜 수 없이 지루하다. ' 아, 휴대폰 사진이라도 봐야지' 나름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내 자신이 너무 기특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휴대폰은 앞 좌석 바닥 가방 안에 들어있고, 나는 지금 양 옆의 건장한 승객들로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지경이다. 하... 몇 분이 흘렀을까? 혼자 끙끙거리며 잠든 그들의 살을 요리 조리 옮겨가며 비집고 들어가 마침내 손에 휴대폰을 쥐었다. 환희에 가득 차 휴대폰 커버를 올리는 순간,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다. 칠흑같은 어둠 속이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게 칠흑 속에서 두 눈을 뜨고 5시간을 비행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빨리 도착해서 남편을 만나고 싶은 마음 뿐이다. 5시간이 5년 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캐리비안해에 위치한 이름도 듣고 보고 못한 나라, 트리니다드 토바고라는 섬으로 사랑에 눈이 멀어와 버렸다. 그때부터였다. 개고생의 시작이었다.



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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