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알게 된 파란의자의 비밀
아파트 엘리베이터 공사를 한다는 공고문이 붙었다. 우리 집은 14층이다. 대략 왕복 400개의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그것도 40일이나. 여러 가지 걱정이 들어왔지만, ‘이참에 강제로 허벅지에 근육을 좀 만들어볼까’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로 해본다.
공사가 시작되었다. 첫날, 14층에서 계단을 내려갔다. 일직선이 아니라 한 층씩 뱅뱅 돌아내려가야 했다. 내려가는 건 그나마 쉬울 것 같았는데 오르는 일만큼이나 내려가는 일도 어려웠다. 벌써 귀갓길 계단 오를 일이 걱정되었다.
이제 시작이다. 집을 향해 한 계단 씩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막 5층을 오를 때 파란 의자 2개를 발견했다. ‘이건 뭐지? 계단을 오르면서 숨이 차면 쉬어가라고 의자가 준비되어 있구나. 굳이 의자까지 필요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냥 지나쳤다. 이 파란 의자는 5층, 9층, 13층 사이에 놓여있다. 우리 집은 14층. 나는 계단을 오르면서 이 파란 의자를 세 번 만날 수 있다. 새롭게 생긴 일 중에 하나는,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자연스럽게 주민들과 ‘힘드시죠? 괜찮아요?’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하루는 마트에 다녀와서 양손 가득 무겁게 계단을 올랐다. 첫 번째 파란 의자가 보였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눈인사를 나누던 낯익은 할머님 두 분이 의자에 앉아서 쉬고 계셨다. 손이 아프고 숨이 고르지 않았지만, 가벼운 인사와 함께 미소를 보내고 지나쳤다. ‘아직 젊어서 잘 올라가네.’라고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기운을 내서 9층에 있는 파란 의자를 향해 계단을 올랐다. ‘거기까지만 가자.’ 곧 만난 파란 의자에 짐을 내려놓고 크게 심호흡을 해본다. 한숨을 돌리고 다시 힘을 내서 집에 도착했다. 중간에 만난 파란 의자에서 잠시 쉰 것이 도움이 되었다.
짐을 무겁게 들고 계단을 올라야 할 때 내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계단 오르기는 가빠지는 호흡과 점점 무거워지는 다리로 인해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손에 물건을 들고 어깨엔 가방을 메고 있다면 더욱 힘들게 느껴진다.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집까지 계단을 올라야 하는 날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에 한 번 숨을 고르기 위해 쉰다면 몇 층에서 쉴까? 가방을 오른손에 드는 게 좋을까? 아님, 어깨에 메는 게 나을까? 물건은 오른손, 왼손 중에 어느 쪽이 괜찮을까? 이런 어쩌면 작고 웃긴 사소한 일을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서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생각을 한다. 그러다 ‘이게 무슨 중요한 일이라고, 이렇게 까지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웃어버리기도 했다.
200 계단을 한 번에 오를 생각을 하면 처음부터 걱정이 앞선다. 힘들 것 같은 생각에 자신감도 없어진다. 하지만, ‘오늘은 어디에서 한번 쉴까? 힘들면 두 번 쉬면 되지.’라고 생각하면 목표지점이 조금 만만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중간의 어느 지점, 작은 목표를 생각하면서 한 계단씩 발을 내딛이면 포기하지 않고 조금 쉽게 완주할 수 있었다.
어쩌면 살아가는 것도 계단 오르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커다란 목표를 만났을 때, 한 번에 다 이룰 것을 생각하면 어려워 보이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럴 때 조금 덜 어려운 중간 목표를 정한다면 힘들지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큰 목표지점의 어디쯤에 파란 의자가 될 어떤 것을 찾으면 된다.
영어책 필사하기 100일 챌린지를 한 적이 있다. 100일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그래서 중간지점에 ‘나에게 선물하기’를 설정했다. 사고 싶어서 장바구니에만 넣어 놓았던 고급 만년필 잉크였다. 50일 즈음에서 만난 블랙네이비 색의 새 잉크로 챌린지를 이어갈 수 있었고, 기분 좋게 무사히 완주하여 100일을 성공했다. 그때는 블랙네이비 고급 만년필 잉크가 파란 의자가 되어 준 것이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어느새 약속한 40일이 지났을 때, 새로운 엘리베이터에 불이 켜졌다. ‘시범 운행 중’이라는 안내판이 반가웠다. 금요일 밤 귀갓길. 아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엄마 엘리베이터 다녀요.’ 이렇게 기쁠 수가. 오래간만에 야식 사들고 가야지. 두 손 무겁게 들고 새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반짝반짝 새 엘리베이터 앞에서의 기쁨도 잠시 계단으로 눈길이 갔다.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없는 파란 의자가 그리웠다. 내 인생의 파란 의자는 있었을까? 그리고 앞으로 어떤 파란 의자를 만날지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