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책 사서 2-1

민교, 정신과 의사를 만나다

by 황은화

2막

거리로 나온 사람들

2막 1장

민교, 정신과 의사를 만나다


다시 정리된 빨간책방. 이전과 비교해 소박해진, 초라해진 진열 상태가 됐다. 민교는 휘파람을 불며 책과 CD를 정리하고 있다.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그는 정신과 의사(이하 ‘정신’)이다.


정신 근처에 약국 있나요?


민교 사방이 약국인데요. (손으로 가리키며) 길 건너편에 우리약국, 국민약국, 저쪽 길 건너편에는 시티약국. 뒤편으로도 50미터 가시면 새마을 약국이라고 또 있어요.


정신 그러고 보니 약국 천국이네.


민교 어디 약 안 먹는 사람 있나요. 뭐 필요하세요?


정신 아스피린이 떨어져서….


민교 아스피린이요? 그거라면 제 꺼 하나 드릴까요?


정신 정말요? 주셔도 돼요?


민교 충분합니다. 요즘 아스피린 없는 사람이 있나요. 그럼 도시인 아니죠.


정신 그런가?! 혹 돈 드릴까요? 그냥 뭐….


민교 괜찮습니다. 돈보다는 책 좀 보세요. 음악도 죽입니다.


정신 물물교환 삼아 껌 하나 드릴까요? (껌을 꺼내 보여주며) 민트!


민교 민트라면 주세요. (껌 받으며) 졸릴 땐 스피아민트가 국룰이죠.


정신 글쵸.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에 모자를 눌러 쓴 소년이 등장. 쪼그려 앉아 모델 화보집을 열심히 본다. 민교는 소년의 행동을 눈치 채지만 그냥 둔다.


정신 사장님, 사람이 싫어지면, 사람이 보기만 해도 혐오스럽고 막 징그럽고 하면 뭘 읽으면 좋을까요?


민교 그냥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좋죠. 여행을 가거나 음악을 듣거나, 뭐 책보다는….


정신 (웃는다) (야한 책을 하나 집어 들며) 도움이 될까요?


민교 아니요, 전혀요. 더 심해질 걸요.


정신 설마?


민교 아니요. 사람이 더 혐오스러워질 수 있어요. 자위에는 도움이 돼도….


정신 마스터베이션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민교 케바케 아닐까요?


정신 노말하지만 리더스 다이제스트, 아님 힐링 에세이를 읽으면 도움이 될까요? 사람이 좀 괜찮게, 그래도 신뢰하고 의존할 수밖에 뭐 그런 존재로 보일까요?


민교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정신 아니요.


민교 책을 많이 안 읽으셨나요? 책이 좀 낯서세요?


정신 책은 뭐 지루하죠. 저 박사 학위도 있습니다. 대충 아시겠죠?


민교 요즘 세상에 배우지 않은 사람 있나요? 다 석사, 박사, 전문가들 천지죠? 저기, 저분 보이시죠? (벤치 쪽에 있는 부랑자2에게 외친다) 저 박사님~~~


부랑자2가 손을 흔든다.


부랑자2 왜, 김사서! 뭐 물어볼 거 있어?


민교 아니요. 그냥 불러 봤어요. 하던 일 하세요.


부랑자2 싱겁긴~


민교 (정신에게) 저 분이 저래도 공학분야 전문가세요.


정신 (작은 소리로) 근데 왜?


민교 (작은 소리로) 주식이 한 순간에 팍!


정신 아하!


부랑자2 (민교에게) 김사서, 모르면 물어봐. 알았제. 자꾸 물어봐야 돼.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냐!


민교 네, 알고 있습니다.


정신 사장님 웃기시네. 김사서라고요?!


민교 김사서라 부릅니다. 여기 고객분들은.


정신 김사서? 김사서님! 사람이 싫어지면 무슨 책이 좋을까요?


민교 음… 요절한 시인의 마지막 시집! (시집 하나 들어올리며) 존 레논 시집도 좋아요. 그게 아니라면 공포영화 혹은 슬래셔무비 보면 차라리 낫던대요. 알아서 다 죽여주잖아요. 슥슥~


정신 아하! 좋네. 슥슥~ 전기톱으로 슥슥 막~ (바보처럼 웃는다.)


민교 스트레스가 많으시구나.


정신 제가 사실 정신과의사입니다. 요즘 좀 우울합니다. 우울의 역습이랄까? 환자들이 죄다 괴물이 돼서리 예전에는 정답 같은 게 있었는데, 요즘 상담자들은 정답이 없어. 이종교배된 괴물들이랄까. 너무 복잡해요. 지나치게 민감하고 특수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 제가 도리어 덫에 걸린 거 있죠. 답은 없고 데미지만 입었어요. 사실 듣다보면 말이죠. 나라면 자살했을 거 같은 일들이 적지 않아요. 그렇다고 자살하라고 할 수도 없고….


민교 그러면 안 되죠.


정신 불면증, 편두통! 내가 착각을 한 건가? 아무래도 적성에 안 맞는 걸 택한 건지…. 영 헷갈리네요.


민교 한 시간만 여기 앉아 있다 가실래요? 껌이라도 씹으면서 (본인 낚시 의자를 보여주며) 여기 앉아 보실래요? 햇빛이나 바람 좋을 때 앉아 있으면 보기보다 힐링됩니다. 멍 때리고 있어 보세요. 커피도 한 잔 타 드릴게요.


정신 사서님, 웃기시네.


민교 웃기려고 한 말 아닙니다. 진짜에요.


정신 아닙니다, 됐어요. 아스피린으로 족해요. 존 레논 시집이나 다시 줘 보세요!


민교 시집을 건네준다, 정신과의사 책을 진지하게 훑어본다. 그 사이, 소년이 민교의 낚시 의자에 뻔뻔하게 앉아 있다. 다리를 꼬고 앉아 낚시 잡지를 태연히 보고 있다. 민교는 아이의 귀를 잡아 일으켜 세운다.


민교 뭐하냐?


소년 아아!


민교 좋은 말 할 때 꺼져!


소년 재수 없어!


아이가 짜증을 내며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데 민교가 아이의 팔을 잡아챈다.


민교 내놔!


소년 뭐요?!


민교 경찰서 갈래?


소년 뭔 소리야?!


소년이 민교의 손을 뿌리치려고 하는데 소용 없다. 민교가 소년의 몸을 뒤진다. 소년의 다리 아래로 영화잡지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진다.


민교 이래도!


소년 씨발, 짱나!


민교 어서 주워!


소년 (눈치 보다가) 뒤져라!


가판을 발로 차고 도망간다. 민교 따라가지 않고 소년에게 소리친다.


민교 다신 내 눈에 띄지 마라! 뒤진다!


가던 소년이 돌아서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린다. 사라진다.


정신 어지러. 구역질 나. 대체 뭘 훔친 거야? 키노?


민교 키노??


정신 (소년이 떨어뜨린 잡지를 뒤적이며) 뭐에요? 포르노 잡지도 아니고.


민교 영화 비평지에요.


정신 희한하네. 요즘 세상에 책을 훔치고….


민교 그러게요~


정신 (존 레논 시집 내밀며) 저는 사서님 추천대로 이 책으로 하겠습니다. 얼마죠?


민교 이 천 오백원.


정신    카드는 안 되죠?


민교, 한숨을 크게 쉰다.


정신 농담이에요 농담. (돈 주며) 자 여기! 또 봐요.


민교 가세요.


민교, 왜인지 모르지만 소년이 사라진 방향을 다시 쳐다본다. 정신과의사 책을 보며 걷다가 멈춰 선다. 멈춰 서더니 존 레논 시의 한 구절을 읽는다.


정신과의사:

먼 옛날/ 그것은 꿈이었을까, 그저 꿈에 지나지 않았을까/ 아니, 나는 알고 있어/ 그것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얼마나 생생했는지/ 길을 걷고 있었지/ 더위로 나뭇잎들이 술렁술렁거렸어/ 그때 들렸어, 분명히 들렸다구/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 것과,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 동시에/ 두 개의 영혼이 매우 이상한 춤을 추고 있었어/ 아아, 매우 짙은 붸바카바/ 아아, 매우 짙은 붸봐카바/ 아아, 매우 짙은 붸봐카바!


무대의 다른 편, 도망간 소년이 구청단속원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한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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