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 정신과 의사를 만나다
다시 정리된 빨간책방. 이전과 비교해 소박해진, 초라해진 진열 상태가 됐다. 민교는 휘파람을 불며 책과 CD를 정리하고 있다.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그는 정신과 의사(이하 ‘정신’)이다.
정신 근처에 약국 있나요?
민교 사방이 약국인데요. (손으로 가리키며) 길 건너편에 우리약국, 국민약국, 저쪽 길 건너편에는 시티약국. 뒤편으로도 50미터 가시면 새마을 약국이라고 또 있어요.
정신 그러고 보니 약국 천국이네.
민교 어디 약 안 먹는 사람 있나요. 뭐 필요하세요?
정신 아스피린이 떨어져서….
민교 아스피린이요? 그거라면 제 꺼 하나 드릴까요?
정신 정말요? 주셔도 돼요?
민교 충분합니다. 요즘 아스피린 없는 사람이 있나요. 그럼 도시인 아니죠.
정신 그런가?! 혹 돈 드릴까요? 그냥 뭐….
민교 괜찮습니다. 돈보다는 책 좀 보세요. 음악도 죽입니다.
정신 물물교환 삼아 껌 하나 드릴까요? (껌을 꺼내 보여주며) 민트!
민교 민트라면 주세요. (껌 받으며) 졸릴 땐 스피아민트가 국룰이죠.
정신 글쵸.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에 모자를 눌러 쓴 소년이 등장. 쪼그려 앉아 모델 화보집을 열심히 본다. 민교는 소년의 행동을 눈치 채지만 그냥 둔다.
정신 사장님, 사람이 싫어지면, 사람이 보기만 해도 혐오스럽고 막 징그럽고 하면 뭘 읽으면 좋을까요?
민교 그냥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좋죠. 여행을 가거나 음악을 듣거나, 뭐 책보다는….
정신 (웃는다) (야한 책을 하나 집어 들며) 도움이 될까요?
민교 아니요, 전혀요. 더 심해질 걸요.
정신 설마?
민교 아니요. 사람이 더 혐오스러워질 수 있어요. 자위에는 도움이 돼도….
정신 마스터베이션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민교 케바케 아닐까요?
정신 노말하지만 리더스 다이제스트, 아님 힐링 에세이를 읽으면 도움이 될까요? 사람이 좀 괜찮게, 그래도 신뢰하고 의존할 수밖에 뭐 그런 존재로 보일까요?
민교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정신 아니요.
민교 책을 많이 안 읽으셨나요? 책이 좀 낯서세요?
정신 책은 뭐 지루하죠. 저 박사 학위도 있습니다. 대충 아시겠죠?
민교 요즘 세상에 배우지 않은 사람 있나요? 다 석사, 박사, 전문가들 천지죠? 저기, 저분 보이시죠? (벤치 쪽에 있는 부랑자2에게 외친다) 저 박사님~~~
부랑자2가 손을 흔든다.
부랑자2 왜, 김사서! 뭐 물어볼 거 있어?
민교 아니요. 그냥 불러 봤어요. 하던 일 하세요.
부랑자2 싱겁긴~
민교 (정신에게) 저 분이 저래도 공학분야 전문가세요.
정신 (작은 소리로) 근데 왜?
민교 (작은 소리로) 주식이 한 순간에 팍!
정신 아하!
부랑자2 (민교에게) 김사서, 모르면 물어봐. 알았제. 자꾸 물어봐야 돼.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냐!
민교 네, 알고 있습니다.
정신 사장님 웃기시네. 김사서라고요?!
민교 김사서라 부릅니다. 여기 고객분들은.
정신 김사서? 김사서님! 사람이 싫어지면 무슨 책이 좋을까요?
민교 음… 요절한 시인의 마지막 시집! (시집 하나 들어올리며) 존 레논 시집도 좋아요. 그게 아니라면 공포영화 혹은 슬래셔무비 보면 차라리 낫던대요. 알아서 다 죽여주잖아요. 슥슥~
정신 아하! 좋네. 슥슥~ 전기톱으로 슥슥 막~ (바보처럼 웃는다.)
민교 스트레스가 많으시구나.
정신 제가 사실 정신과의사입니다. 요즘 좀 우울합니다. 우울의 역습이랄까? 환자들이 죄다 괴물이 돼서리 예전에는 정답 같은 게 있었는데, 요즘 상담자들은 정답이 없어. 이종교배된 괴물들이랄까. 너무 복잡해요. 지나치게 민감하고 특수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 제가 도리어 덫에 걸린 거 있죠. 답은 없고 데미지만 입었어요. 사실 듣다보면 말이죠. 나라면 자살했을 거 같은 일들이 적지 않아요. 그렇다고 자살하라고 할 수도 없고….
민교 그러면 안 되죠.
정신 불면증, 편두통! 내가 착각을 한 건가? 아무래도 적성에 안 맞는 걸 택한 건지…. 영 헷갈리네요.
민교 한 시간만 여기 앉아 있다 가실래요? 껌이라도 씹으면서 (본인 낚시 의자를 보여주며) 여기 앉아 보실래요? 햇빛이나 바람 좋을 때 앉아 있으면 보기보다 힐링됩니다. 멍 때리고 있어 보세요. 커피도 한 잔 타 드릴게요.
정신 사서님, 웃기시네.
민교 웃기려고 한 말 아닙니다. 진짜에요.
정신 아닙니다, 됐어요. 아스피린으로 족해요. 존 레논 시집이나 다시 줘 보세요!
민교 시집을 건네준다, 정신과의사 책을 진지하게 훑어본다. 그 사이, 소년이 민교의 낚시 의자에 뻔뻔하게 앉아 있다. 다리를 꼬고 앉아 낚시 잡지를 태연히 보고 있다. 민교는 아이의 귀를 잡아 일으켜 세운다.
민교 뭐하냐?
소년 아아!
민교 좋은 말 할 때 꺼져!
소년 재수 없어!
아이가 짜증을 내며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데 민교가 아이의 팔을 잡아챈다.
민교 내놔!
소년 뭐요?!
민교 경찰서 갈래?
소년 뭔 소리야?!
소년이 민교의 손을 뿌리치려고 하는데 소용 없다. 민교가 소년의 몸을 뒤진다. 소년의 다리 아래로 영화잡지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진다.
민교 이래도!
소년 씨발, 짱나!
민교 어서 주워!
소년 (눈치 보다가) 뒤져라!
가판을 발로 차고 도망간다. 민교 따라가지 않고 소년에게 소리친다.
민교 다신 내 눈에 띄지 마라! 뒤진다!
가던 소년이 돌아서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린다. 사라진다.
정신 어지러. 구역질 나. 대체 뭘 훔친 거야? 키노?
민교 키노??
정신 (소년이 떨어뜨린 잡지를 뒤적이며) 뭐에요? 포르노 잡지도 아니고.
민교 영화 비평지에요.
정신 희한하네. 요즘 세상에 책을 훔치고….
민교 그러게요~
정신 (존 레논 시집 내밀며) 저는 사서님 추천대로 이 책으로 하겠습니다. 얼마죠?
민교 이 천 오백원.
정신 카드는 안 되죠?
민교, 한숨을 크게 쉰다.
정신 농담이에요 농담. (돈 주며) 자 여기! 또 봐요.
민교 가세요.
민교, 왜인지 모르지만 소년이 사라진 방향을 다시 쳐다본다. 정신과의사 책을 보며 걷다가 멈춰 선다. 멈춰 서더니 존 레논 시의 한 구절을 읽는다.
정신과의사:
먼 옛날/ 그것은 꿈이었을까, 그저 꿈에 지나지 않았을까/ 아니, 나는 알고 있어/ 그것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얼마나 생생했는지/ 길을 걷고 있었지/ 더위로 나뭇잎들이 술렁술렁거렸어/ 그때 들렸어, 분명히 들렸다구/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 것과,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 동시에/ 두 개의 영혼이 매우 이상한 춤을 추고 있었어/ 아아, 매우 짙은 붸바카바/ 아아, 매우 짙은 붸봐카바/ 아아, 매우 짙은 붸봐카바!
무대의 다른 편, 도망간 소년이 구청단속원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한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