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년
최루탄 연기가 사라지고 쓰러진 두 사람이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붉게 부풀어 오르고 먼지로 시커메진 상태. 잔기침을 계속 하는 가운데 입에서 침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민교, 바지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과 코를 막는다.
민교 어디서 시위야? 아직도 최루탄을 써??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소년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며) 야! 괜찮냐? 괜찮아?
민교, 소년의 얼굴을 보더니 웃음을 참지 못한다.
민교 이디오피아 난민이 따로 없네. 여기 뭐 전쟁터냐?!
소년 아저씨도 거지같아.
민교 (헛웃음을 치며) 젠장! 눈을 못 뜨겠다. 진짜 뭐지?!
민교는 바닥에 앉는 자세지만 소년은 여전히 일어나지 않고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소년 오늘 드럽게 재수 없다.
민교 그러게.
소년 짜증나.
민교 (발로 소년의 어깨를 건드리며) 너 말야, 존댓말은 어디 국 끓여 먹었냐?
소년, 몸을 아기처럼 웅크린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듣고 민교, 주머니에서 초코바를 꺼내 소년에게 건넨다.
민교 (잔기침하며) 가지가지다. 이거라도 먹어!
소년, 누운 상태로 초코렛을 씹어먹는다. 민교가 초코바를 하나 더 건네 준다. 소년 기다렸다는 듯 받아먹는다.
민교 다친 강아지 밥 주는 거 같네.
소년 또 없어?
민교 없다, 그지야!
소년 근데 이거 어디 꺼야? 이런 맛 처음이야!
민교 너 가출 했지?
소년, 듣는 둥 마는 둥 초코렛 씹기에 열중한다.
민교 형님들한테 뭔 짓거리 한 거냐? 저 형님들이 시간 남아돌고 딱히 할 일이 없어도 저렇게 꿍짝이 맞아서 살기롭지 않은데… 대단한 개인주의자들이라서 말야. 뭔 짓을 한 거야? (소년 대답이 없자) 됐다.
니 말 들어 뭐하냐?
소년 개꼰대들.
민교 니가 더 쥐어 터져야겠구나!
소년 씨바 짱나~
민교, 담배 꺼내서 핀다.
소년 나도 줘!
민교 너 완전 비행청소년이구나.
소년, 민교의 담배를 뺏어서 핀다. 민교가 소년의 뒷통수를 치지만 그냥 버티며 담배를 피운다.
민교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소년 걱정 마요! 아저씨처럼은 안 될 거니까.
민교 (새로 담배를 꺼내며) 그래~ 나처럼은 되지 말아라. 제발이다.
두 사람 담배를 피운다. 최루탄 때문에 목이 따가워 중간 중간 기침을 한다.
사이.
민교 뻘짓하지 말고 집에 들어가라!
소년 좆 같아.
민교 사실 나도 가출했다. 좆같아서. 뭐가 좆같은 진 몰라도…. 그래서 이제 어디 갈꺼냐, 비행청소년!
소년 뭔 상관! (사이) 영화 보러.
민교 영화? 그 꼴로 영화를 보러 가?!
소년 뭔 상관!
민교가 소년의 뒤통수를 친다.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가려져 있던 소년의 얼굴을 보자 민교는 란다.
민교 이제는 어른한테 존댓말 좀 하시….
소년 씨발! (째려본다.)
민교 너….
소년 왜?
민교 그니까 너….
민교, 자신의 눈을 비비며 앞에 있는 소년을 멍하니 바라본다.
소년 최루탄 제대로 맞았네. 정신 차려, 아저씨!
민교 영화 보러 간다고? 무슨 영화?
소년 ‘희생’.
민교 (거의 들리지 않는 희미한 말투로 따라한다) ‘희생’.
민교, 자신의 뺨을 갑자기 때려본다. 혼잣말을 한다. (“정신 차려야지, 정신 차려!, 어지럽다, 넘 어지러워”)
소년, 그 사이 모자를 더 깊숙이 눌러쓴다.
민교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희생’. 제목이 꽤 고전적이네. 어렸을 때 제일 좋아하던 영화제목하고 같아. 참, 요즘 세상 뻔뻔해. 어디 가나 상도덕이 씨가 말랐어. 같은 장르끼리 제목 그대로 베껴 쓰고, 뻔 뻔하다 뻔뻔해. 대체 감독이 누구냐?
소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민교 뭐? 타르코프스키?
소년이 고개를 끄덕인다.
민교 그 영화를 지금 극장에서 해준다고??
소년이 고개를 끄덕인다.
민교 고전영화 재상영, 리마스터링이란 말 기사로 듣긴 들었는데 진짜 개념 있네. 와아~ 타르코프스키라고? 대체 어디서 하는데?
소년 단성사요.
민교 미친! 야, 단성사 없어진 게 언젠데. 거기 이제 멀티플렉스야, 멍충아!
소년 아저씨, 약 먹었어요? 근데 멀티플렉스는 뭐야?
민교 너 외계인이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단성사?! 말이 되니?
소년 맞거든요. 어제도 가서 봤다고! 아저씨야말로 헛소리 그만해요.
민교 진짜?
소년 아 진짜~
민교 (진지하게 소년의 눈을 응시하며) 너, 그럼 프랑수와 트뤼포 알아?
소년 무시해요. 당연하죠. 피카디리에서 봤어요. ‘400번의 구타’
민교 미치고 환장하겠네. 너 구타당하고 싶냐? 뭐 피카디리?!!
소년이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다.
민교 너 몇 살이라고?
소년 나이는 왜요. 먹을 만큼 먹었어요.
민교 야, 개싸가지! 2012년이야!
소년 아저씨, 정신 차리세요. 지금 1994년이에요.
민교 야!
소년 왜요?
민교 장난치지 말고, 그럴 기분 아니니까.
소년 아저씨! (양손의 가운데 손가락 들어올리며) 이게 몇 개에요?
민교 진짜 94년이라고? (헛웃음 치며) 웃긴다. 야, 그럼 너 지금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뭐야?
소년 ‘서시’.
민교 신성우?
소년 그럼 누구요?
민교 또 어떤 노래 좋아해?
소년 경찰이세요. 완전 취조를 하시네. 어이 없어. (사이) ‘날아라 병아리’.
민교 미쳤다!!!
소년 왜 미쳐? 넥스트 다 좋아해요. 가요 탑텐 몰라요?!
민교 (소년 어깨 잡으며) 똑바로 말해! 장난치지 말고, 오늘이 며칠이야?
소년 6월 4일 화요일.
민교 1994년?
소년 일천구백 구십 사년 유월 사일 화요일! 됐어요?!
민교 (소년의 말을 따라하며) 94년 6월 4일 화요일. 지금 몇 시야?
소년이 손목시계를 주머니에서 꺼낸다. 파란 카시오 손목시계(전자시계)이다.
민교 이거 어디서 났니?
소년 훔친 거 아니거든요.
민교가 시계를 계속 주시한다.
소년 안 훔쳤다고! 일주일 전에 아빠가 생일선물로 줬다고! 선물이라고!
민교 (작은 소리로) 생일?!
민교,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 갑자기 소년의 모자를 벗겨버린다. 그리고는 당황한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소년 건드리지 말랬지.
민교 잠깐만, 잠깐만 있어봐! 그대로!
민교, 손수건으로 소년의 더러워진 얼굴을 닦는다.
사이.
민교, 자기도 모르게 손이 소년의 얼굴로 향한다. 소년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진다. 소년은 발작하듯 민교의 무릎을 발로 찬다.
소년 변태새끼! 이 새끼 이거 잘해준다 했더니 호모새끼 아냐?! 어이없어. 내가 만만해 보이냐 이 찐따 변태새끼야!
민교, 소년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상태이다.
소년 일진 진짜 더럽네! 퉤! 퉤!
소년, 민교에게 침을 뱉고 도망친다. 민교, 멍한 표정으로 소년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한다.
민교 (힘이 다 빠진 상태로) 이상한데 말야, 진짜 이상한데, 너, 나니? 민교, 김민교!
음악이 흐른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