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하는 말
다시 극장 뒤 골목
눈물에 젖은 소년은 극장을 나오자마자 담배를 찾지만 담배갑은 비었다. 빈 담배갑을 집어던진 후, 발로 땅을 세게 구르며 허공에 소리를 지른다.
잠시 후, 다리를 절뚝이며 민교가 소년에게 다가온다. 민교를 보자 소년은 본능적으로 주변에 있던 깨어진 유리 조각을 주워 든다. 유리조각을 내밀며 민교를 경계한다.
민교 담배 줄까?
소년 왜 따라다녀?
민교 오해는 마. 그냥 왔는데 니가 있는 거야!
소년 우연히 영화도 보시고.
민교 나도 너처럼 영화광이야. 근데 영화가 슬펐니? 몇 십 년 만에 다시 보니까 난 지루하던데….
소년 당신이 지루한 거야.
민교 여긴 나도 잘 아는 곳이다. 담배도 여기서 처음 피웠지. 담배도 피우고 영화 포스터도 몰래 뜯어가고 별짓 다했다 (담배 권하며) 자~
소년은 담배를 거절한다. 민교, 혼자 담배를 피운다.
민교 지루해도 아름다운 영화야. ‘희생’은 20세기의 유산이지.
소년 아저씨, 비밀 하나 가르쳐 줄까? 아저씨 가게 단속 뜬 거 내가 신고한 거야. 몰랐지?
고개를 끄덕이는 민교.
민교 어차피 때려 치려 했어. 잘했다. 니가 해줘서 정말 고맙다.
소년 아저씨,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나 열 여덟 미성년자야. 그리고 호모 아니거든. 그러니까 제발 꺼져!
민교 알았으니까 그 유리 좀 내려놔라! 무섭다.
소년 꺼지라고 쫌!
민교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다가 가져온 잡지를 꺼내더니 소년에게 내민다.
민교 니 덕에 제대로 망했다. 이젠 이거 하나 남았다. 가져라!
소년이 받지 않자 민교는 잡지를 소년의 발 근처로 던져놓는다. (잡지는 전에 소년이 훔치려고 했던 ‘키노’ 이다.)
소년 대단한 거 주시네!
민교 그럼 대단한 거지.
소년 이젠 필요 없거든.
민교 과연 그럴까? 귀한 거다.
소년, 유리 조각을 내려놓고 잡지를 집어든다.
민교 팀 버튼 특집 기사에,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 소개도 있어. 타란티노는 나중에 어마어마한 거장이 되니까 미리 읽어봐. 그리고 에릭 로메르 계절 연작 분석도 예술이야. 그리고 이창동 감독 단독인터뷰도 있는데….
그때 소년의 친구가 나타나 심각한 표정으로 소년에게 귓속말을 전하고 떠난다. 소년,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들고 있던 잡지를 떨어뜨린다.
소년, 잠시 두 눈을 감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다 어딘가로 가려고 하는데 민교가 소년의 어깨를 잡는다.
민교 가지 마라!
소년 당신 뭔대? 뭔대 자꾸 참견이야!
민교 거기 가는 거라면 가지 마!
소년 뭘 안다고?
민교 그냥 알 거 같아. 너 지금 굉장히 위험한 곳에 가려고 하잖아.
소년 세상 자체가 위험해. 이 골목도 안전하지 않고, 당신도 나한테는 위험해!
민교 남자 대 남자로 하는 말이다. 내 얼굴 좀 봐!
소년, 혐오의 시선으로 민교를 바라본다.
사이.
소년 나한테 반한 거야?
민교 맞아. 나 너한테 반한 거 같다.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거기 가지 말고 여기서 나랑 담배나 한 대 피우고 그리고, 집으로 가면 어떨까?
소년 개소리!
민교 그게 좋을 거 같아. 내가 좀 살아봐서 아는데 그게 좋을 거 같아. 감정대로 행동하지 말고, (사이) 너의 미래를 차분히 생각했으면 좋겠어, 나는.
소년 나의 미래? (코웃음을 친다.) 그렇게 미래를 잘 아는 사람이 다리병신으로 사나? 당신 미래나 걱정해.
민교 (참았던 감정이 조금씩 터지며)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가지 말라고 씨발!
민교, 몸을 떨기까지 한다.
사이.
민교 어떤 사람은... (힘겹게 침을 삼키며) 어떤 사람은 감정대로 살다가 이렇게 병신이 되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여기에 멈춰 있으라고 쫌!
소년 놔! 놓으라고!
두 사람이 팔로 힘겨루기를 한다. 민교의 힘에 소년이 넘어진다. 소년의 몸에 올라탄 민교가 소년의 두 손을 땅에 짓누른다.
민교 넌 어려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무모한 짓이라고!
소년 조용히 집으로 가면 달라져. 내 미래가 달라지냐고!
민교 적어도 후회하거나….
소년 개소리 집어쳐. 내 마음이 어떤지 알기나 해. 지금 누나가 어떤 상황인데….
민교 달라지지 않아. 니가 그곳에 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진 않는다고!
소년 어떻게 그걸 확신하지?
민교 아니까.
소년 이거 놔!
민교 니 주머니에 동전 있잖아. 그걸로 경찰서에 전화하자! 그게 지혜로운 거야. 어른들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거야.
소년 어른들의 방식? 어른들이 뭘 하는데, 우리들을 위해 뭘 할 수 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거 놔!
민교 싫어!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한다. 소년이 잡혀 있던 손 한쪽을 빼서 돌을 줍는다. 그 돌로 민교의 머리를 내리친다. 민교, 쓰러진다. 소년, 민교의 배를 발로 가격한다. 신음하는 민교.
소년은 쓰러진 민교를 두고 떠나려고 한다.
민교 민교야, 민교야!
멈춰 선 소년. (민교를 향해 등을 보이고 서 있다.)
민교 니 인생 전체를 걸고도 중요한 거야? 너도 꿈이 있잖아.
소년 내 꿈은 비겁자가 아냐!
민교 그건 비겁이 아니라 어리석음이야.
소년 (차분한 말투로) 뭘 아는 척 짓거리지 마! 난 누나를 잃지 않을 거야.
민교 너의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거야. 어두워진다고!
소년 지금도 충분히 어두워.
민교 넌 누구니?
소년 당신이야 말로 누구야?
민교 감당할 수 있겠어? 난 네가 어떤 일을 당할지 알고 있어.
소년 누나를 알아요? 그 사랑스런 여자를 아냐고, 당신이!
민교 몰라, 모르겠어. 그때도 그 이후로도 이해할 수 없었어. 왜 나한테 솔직하지 않았던 건지. 정말 나를 좋아했던 건지. 그렇게 힘든데 왜 나한테 의지하지 않았던 건지. 이해 못해. 절대 못해. 난 사랑했고 다 감당할 수 있었는데. 난 진짜 자신 있었다고! 그런데 왜? 왜 날 버린 거야? 나는, 정말로, 당신이 없으면 안됐는데 왜…….
눈물로 범벅이 된 민교.
사이.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소년.
소년 정신 차려요! 자꾸 나를 아는 척 하시는 데 아니야. 틀렸어. 당신 착각이야! 만약 그쪽이 나라면 나는 분명 본능적으로 알아봤을 거야. 하지만 아냐! 조 금 비슷할 뿐야. 아니 그것도 난 모르겠어. 당신이 나라면 분명 머리든, 가슴이든 반응했을 거야. 그런데 전혀 없어. 내가 당신이라고?! 당신 같은 사람이 나의 미래라고?! 장난해? 당신이라면 믿겠어? 미안하지만 사양하겠 어. 제발 내 미래를 모욕하지 마!
민교 미안하다. 하지만,
소년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결정하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 오직 나 자신 뿐이다.’ 영화광이라고 했지? 누가 한 말인 줄 알겠네.
민교가 대답이 없자,
소년 오손 웰즈야. 나는 내가 알아서 할게.
민교 민교야!
소년 뭔지 모르겠지만 사라져요, 제발!
민교 진짜 갈 거니? 진짜 후회 없지?
소년 당신은 후회해?
민교 어쩌면. (사이) 너는 나랑 달랐구나. 이제는 너와 나도 타인이구나. 이렇게 몰라 볼 수도 있다니
…. 말도 안 돼! 꼭 한 번 봤으면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나를 몰라보다니…. 다른 날, 다른 순간에 봤으면 조금은 알아볼 수 있었겠 지. 그랬다면 우리가…. (말을 하려다가 멈춘다) (사이) 가라! 그래 가!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까!
민교, 주머니에서 휴대용칼(맥가이버칼)을 꺼내 소년에게 내민다.
민교 쓰라는 게 아니고 그냥 주머니에 넣어 둬!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소년이 칼끝을 바라본다.
소년 겁쟁이!
민교 맞아, 나 겁쟁이야. 겁쟁이를 위해서 넣어둬!
소년, 휴대용칼을 뺏어 잡지가 있는 쪽으로 던져버린다.
소년 왜 그렇게 바보 같아.
민교 이상해. 그때의 감정이 납득이 안 돼. 그때는 여기서 떠날 때 그저 가볍게 주먹을 쥐고 일어났어. 마치 주말에 도서관에 가듯이 가볍게 일어나 터벅터벅 걸어갔어. 조금 떨리긴 했지만 의심이란 모르고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종점으로 향했지. 복수하고 싶었어. 다 찢어발기고 싶었어. 그때의 나는 의심이란 없었는데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왜 자꾸 두려운 거지?
소년 다시 보니 변태는 아니네. 나 갈게요.
민교 우리 다시 볼 날이 있을까?
소년 없겠죠.
민교 그러겠지. 아마도. 잘 지내라!
소년 잘 지내세요. 더 강해지세요.
민교 민교야! (사이) 반가웠다.
소년 뭐….
민교 영화만 보지 말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도 말고, 아, 그리고 너희집 개 감자 잘 챙겨주라! 오래 못살 거야. 진짜 잘 챙겨줘!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
민교 담배나 한 대 피고 갈래?
고개를 가로젓는 소년. 두 사람은 서로를 진심으로 쳐다본다. 소년, 잠시 주춤하다 결심을 하고 뒤돌아 뛰어간다. 민교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잠시 후, 민교는 담배를 피운다. 연기를 깊게 내뱉는다.
민교 잘 가라, 소년아! (사이)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같이 담배나 피울 걸. 꼰 대처럼 뭐 한 거니? 이제 너도 떠나고 없구나. 내가 떠나지 못해서 결국 네 가 나를 떠났구나. 어쩌면 평생 니 꽁무니를 쫓아다녔나봐. 떠나지 못하고 계속 너를 원망하고 있었나봐. 그래서 결국 네가 떠났구나. 너는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영화를 추앙했고, 제대로 무모했구나. (사이) 대체 나는 누구니?
담배 연기가 깊어진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