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내내 나는 이방인이었다. 내 선택적 기억 저장소엔 다른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초등학교를 나왔고 선생님들의 불필요한 편애 때문이었다고 남아 있지만 또래들에게 밉보일 행각을 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여학생이 화장실을 혼자 가야 한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10시간과도 같았던 쉬는 시간 10분, 나는 빛의 속도로 복도를 활주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사회적 리셋을 꾀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온,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자아이와 같은 반 배정을 받았다. 입학 첫날 모두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압박감과 설렘에 쭈뼛댈 때 그 애에게 나랑 화장실 같이 가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 말은 곧 앞으로 나와 도시락도 같이 먹고, 매점도 같이 가고, 좋아하는 남자애가 누군지도 나누고 종종 노트도 바꿔 보자는 많은 뜻을 내포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아니, 나는 안 갈래”라는 퉁명스러운 답변이었다. 아마도 그 여학생은 한국 정서가 입력되어 있지 않은 탓에 내 깊은 속뜻을 몰랐으리라. 다행히 나는 그 아이 아닌 다른 부류의 친구들을 금세 사귀고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서른이 훌쩍 넘은 요즈음 직장에서 나의 유일한 안식처는 화장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화장실 부스 칸막이 안이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평화로운 손바닥만한 공간. 더 이상 화장실은 수다의 공간도 뒷담화나 낙서판도 아니다. 직장에서 서바이벌하다 보면 같이 있으며 고독한 것보다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다. 조연출 시절엔 선배에게 부당하게 혼난 뒤 화장실에서 혼자 입술을 깨물며 소리 나지 않게 울었다. 여자라고 얕보이기 쉬운 방송사에서 우는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연출을 달고서야 울고 싶을 때 울지도 못하냐, 몰래 울게 무어냐 하면서 어디서나 맘껏 울 수 있는 자유를 내게 허했다.
얼마 전 정말 혼자이고 싶어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문고리를 걸었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나 트위터 따위를 들여다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을 때쯤, 옆 칸에서 장렬한 사운드와 함께 활발한 배설 활동이 시작되었다. 욕하는 게 아니다. 옆 칸의 그는 화장실을 본연의 기능에 맞게 사용할 줄 아는 평범한 유저였다.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짓말 같게도 다른 쪽 옆 칸에서도 질세라 예고음과 함께 줄기찬 굉음이 시작되었다. 아침도 아닌데 한낮에 다들 거사 중이구나. 그러다 이내 역해지기 시작했다. 사운드는 참을 수 있었지만 ‘스멜’이 서라운드로 몰려올 때의 현실 자각이란. 나는 누구인가, 또 여긴 어디인가. 무슨 잘못을 크게 짓고 살아왔기에 스테레오로 똥 사운드를 들으며 여기 숨어 있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대로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난 소중하고, 인간은 존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