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싶은 마음

폭식의 시절, 그 많은 음식을 먹은 나의 마음에 대해

by 시원

밤이 되면 손가락이 바빠진다. 휴대폰 화면 위를 습관처럼 쓸어 넘긴다.

오늘의 입맛을 찾아 떠돌다, 동네에서 제일 인기 있다는 횟집의 화면에서 주문을 끝낸다.

30분 후 배달이 완료됐다는 알림이 울리면, 빠른 걸음으로 현관문을 연다. 문 앞에 도착한 회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는 순간—

마치 누군가와 비밀 약속이라도 한 듯, 손끝에 묘한 긴장감이 돈다.


겨울이 제철이라는 방어 한 점을 간장에 살짝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차갑고 탱글한 감촉이 혀끝을 눌렀고, 은은한 감칠맛이 조용히 퍼진다. 깻잎에 싸 먹기도 하고, 그대로 씹으며 식감만 음미하기도 하며, 한 접시를 천천히 비운다. 곁들여 온 매운탕을 가스레인지에 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국물이 바글거리기 시작하면, 숟가락으로 한 모금 떠 호호 불어 간을 보고, 곧 라면사리를 꺼내 조심스레 넣는다. 입안을 시원하게 만들었던 회의 여운 위로, 매운 국물의 열기가 겹겹이 쌓인다. 면발이 부드럽게 풀리는 시점엔, 이미 폭식의 엔진은 조용히 시동을 걸고 가속 중이다.


식사의 마무리도 정해져 있다. 냉동실에서 꺼낸 체리 아이스크림.

달콤하고 차가운 맛이, 앞서 삼킨 매운 기운을 눌러 식힌다. 그렇게 입안은 분주했고, 식탁 위는 소리 없는 전장을 닮았다. 치울 생각에 아득해지는 플라스틱 용기들과 먹다 남은 잔해들은, 마치 방금 끝난 범행의 흔적처럼 놓여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까. 체중계가 확인의 도구가 아니라 피하고 싶은 물건이 된 건.

옷은 이상하게 줄어들었다. 허벅지에서 멈춘 바지는 서랍 안으로 사라졌고, 단추는 버티지 못했다.

지퍼는자꾸만 중간쯤에서 멈췄다.


이상한 일이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가, 몇 분 뒤에 또다시 열고 닫는 일을 반복한다. 안에 뭐가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마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처럼 수십 번을 여닫다 보면 결국 무언가를 꺼내게 된다.

반도 남지 않은 아이스크림, 전날 먹다 남은 치킨 몇 조각.

그런 것들로도 채워지지 않는 밤이면, 결국 손가락은 배달 앱 속 붉게 빛나는 ‘주문하기’ 버튼 위에 멈춘다.


폭식은 조용히 틈새로 스며든 빗물 같다.

오늘은 괜찮겠지. 내일부터는 줄일 수 있겠지.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니까.

그런 타협과 미루기가 몇 번 쌓이고 나면, 어느새 내 몸은 내가 감당하기엔 조금 큰 사이즈가 되어 있었다.


카톡이나 메일을 잘 읽지 않았다.
알림 숫자가 뜨면 거슬려서 그냥 채팅창에 들어갔다 나오는 식으로 지웠다. 만나자는 메시지엔 답하지 않거나, ‘일정이 있어서 죄송해요’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낮에는 거북이인지 굼벵이인지 모를 느릿한 몸으로 일하러 나갔다가 사람들의 말에 안테나를 세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그 말들을 곱씹으며 괜한 해석을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상의 무대에서 살짝 퇴장한 관객 같다고.
배우처럼 살아야 할 것만 같던 날들 속에서, 어느 순간 나는 무대에 오르기보다 조용히 커튼 뒤로 숨어버렸다.
누가 나를 부르면 들리는 척은 했지만, 다시 나설 힘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하루종일 커피와 빵으로 버티던 나는 밤이 되면 비로소 입맛을 찾았다.

매콤한 아귀찜을 먹고, 맵다며 아이스크림 한 통을 비우고, 달다며 새우깡 한 봉지를 해치웠다.

배는 둥글게 부풀었고, 몸속 소화기관들은 어디론가 떠난 것처럼 느껴졌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포만감 속에서 그제야 이건 무언가가 잘못된 거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다음 날, 나는 또 야식을 시켰다. 전날의 알아차림은 꿈속의 장면처럼 흐릿했다. 그렇게 폭식은 자책과 무기력의 반복적인 구조 안에서 확실하게 퍼져갔다. 체중계는 화장대 아래로 밀어 뒀고, 고무줄 바지는 내 편을 들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식욕은 생존의 반응이 아니라 위로의 반응이었는지 모르겠다. 배고픔보다 ‘채우고 싶음’이 컸으리라.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을 적절하지 않은 시간과 과도한 양을 먹어댄 나라는 걸 알지만 입은 멈추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랬다. 사람은 감정이 아니라 습관대로 산다고.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또 배달앱을 켰다.


그러다 천천히, 음식의 무게가 몸에 고스란히 쌓였다는 걸 알게 됐다. 그제야 배달앱을 터치하는 속도가 더디어졌고, 숟가락을 들던 손가락에 힘이 빠졌다.

‘‘그만 먹자’라는 마음은 작은 모래알처럼 마음속에 들어와 천천히 굴러다니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났다.


체중계 위에 다시 섰다. 심호흡과 함께 올라가는 순간, 마치 성적표를 받아 드는 기분이 든다. 쭈욱 올라가다 멈춘 숫자를 보고 울컥하는 대신 배를 잡고 웃었다.

“아, 진짜 많이도 먹었네. 정말 열심히도 먹었네.”


그날 밤, 나의 먹성을 칭찬해야 할지 비웃어야 할지 모른 채 한참 웃고는, 냉장고에서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 배달 어플을 여는 대신 이불을 열어 침대에 누웠다.


먹는 일은 여전히 쉽고, 자주 반복된다. 속상하다는 말 대신 주문하기 버튼을 누르고, 피곤하다는 말 대신 매운 음식을 삼킨다. 누군가가 한 상 가득 비운 그릇 앞에 앉아 있다면, 그건 꼭 허기 때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먹는 마음’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은 있을 테다.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먹게 되는 날들에서 중요한 건 그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냉장고 앞에서 잠깐 멈추는 것만으로도, 배달 어플을 열지 않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천천히 식기 시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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