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쌓은 탑, 그 무엇 하나 헛되지 아니하다.
나는 간호사다. 졸업 후 운이 좋아 경력 단절 없이 아이들을 키우며 병원에서 일했다.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간호사는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을 앞세워 무기력과 번아웃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현재는 다시 간호사로 돌아왔다.
눈 깜짝할 새는 아니더라도 보통 그 이상의 속도로 지나온 거 같은데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보니 학번과 같은 년도에 태어난 신생아들이 신규 간호사로 입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이만치나 지나왔다는 걸 실감했다.
나야 나, 고연차 간호사
피를 보는 걸 무서워하거나 사람을 만지는 걸 꺼려하는 편이 아니라서 진상 환자를 만났다거나 동료들과 의견이 맞지 않을 그럴 때 말고 일을 때려치워야겠다고 마음먹은 때가 별로 없었다. 물론 간호사 이름표를 달고 이렇게 오랜 시간 출근할 거라고 마음먹은 적도 딱히 없다.
나이팅게일 같은 위인적 포부나 거창한 이유로 간호학과를 입학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여자 전문직으로 비교적 업무가 명확하고 취업문이 넓었기에 부모님과 반반의 의견을 물어 진학했다.
생물과 해부학을 좋아하고 흥미 있던 이과를 선택한 고등학생이었는데 그것은 업을 지속하며 알게 된 현재 진행형적인 인과관계이다.
가정이랑 미술과목을 좋아했다. 바느질하기, 쨈 만들기, 샌드위치 만들기가 재밌었다. 미술시간은 그림을 그리는 것 것보다는 무언가 만들어 내는 걸 참 좋아했다.
그럼에도 간호사를 택하게 된 인과관계를 찾아보려 애를 써보면 생물시간에 개구리 해부 실습이 흥미로웠다는 것, 교련시간에 응급처치와 십자붕대감기 실습 때 호기심이 생겼고 흥미로웠던 게 생각났다. 아무래도 그것이
업을 택하게 된 결정적 이유였을까?
이래저래 이유를 찾아보려고 해 봤지만
다이어리 꾸미기, 우정 일기 쓰기, 밤새워서 판타지 소설 읽기 , 낙서하듯 글쓰기, 십자수하기, 피아노악보와 엽서 모으기 등등 소소한 행복을 위해 애쓰는 그 흔한 꿈 많은 여고생이었을 뿐 간호사가 된 결정적 이유 따윈 없었던 게 맞다.
아이들을 키우며 정신없이 출퇴근을 반복하며 지나온 것 같은데 돌아보니 20년을 지속한 고연차 간호사가 되어 있다. 누군가가 20년을 한 업에 종사했다고 하면 생활의 달인에 나와야 할 것 같고 능수능란하게 일을 척척 해낼 것 같은데
나의 현실은 출근하면
퇴근하고 싶어지는 감정노동자
예민한 환자를 만나도 상황을 주도하며 조용히 정맥주사를 놓고 마무리할 때 스스로를 기특해하기도 하고 소통이 안 되는 보호자를 만나 애를 쓸 때면 괜히 안쓰럽기도 하다.
단번에 주사를 놓는 간호사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칭찬을 들은 거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고
주사를 던져도 혈관에 들어가겠다며 자신만만하다가도 몇 번 찔러 겨우 혈관을 찾아 수액을 연결하고 쭈글쭈글 퇴근을 하기도 한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들려온 목소리,
"선생님 아무개님 수액연결 좀 부탁드려요.
혈관이 또 터져서 스타트 다시 해야 해요."
출근하면 퇴근하고 싶고
퇴근하면 출근하고 싶은 거
나만 이러는 걸까요?
어쩌다 반자동적으로 출퇴근을 반복하다 보니
쌓아진 이 시간의 탑, 멀찍이 바라보니
그 무엇 하나 헛되지 아니하다.
그러니 오늘도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