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다락방 Aug 15. 2024

2리터의 물

해가 갈수록 두렵다

마흔에 접어들면서 매년 꼭 하는 일이 있다. 바로 건강검진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연초에 예약해 둔 검진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몇 년 전에 했던 대장내시경을 다시 해야 했기에 긴장이 되었다. 대장내시경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그 물약이 복병이다. 하루에 물 두 컵도 겨우 마시는 사람이 물약을 마시고 2리터의 물을 마셔야 하는 게 너무 곤욕이었다. 약 먹는 일뿐만이 아니다. 건강검진 일주일 전부터 음식도 조절해야 한다. 고춧가루가 많은 음식과 견과류, 깨, 김, 미역 등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 대부분이다. 검진 전날은 오후 2시부터 금식을 해야 한다. 일주일 동안 관리를 잘했기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다. 학우님들과 저녁 모임이 생긴 것이다. 왜 하필 오늘인지 그리고 왜 하필 치킨집이어야 하는지 모임에 갈지 말지 순간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우님들과 친해질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텀블러에 시원한 냉수를 가득 채워 치킨집으로 향했다. 입구에서부터 식욕을 자극하는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의 사정을 모르는 학우들은 메뉴판에서 ‘베스트’라고 적힌 음식을 여러 개 시키기 시작했다. 거기다 살얼음 동동 띄운 생맥주까지 주문했다. 왜 안 먹냐고 물어보는 학우에게 조용히 건강검진 때문에 금식해야 한다고 했더니 나를 아주 애처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일주일 내내 먹고 싶은 음식 못 먹은 것도 힘들었는데 하필 전날 치맥을 마시는 자리에 참석하다니. 타이밍 참…. 텀블러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뿔싸 6시가 넘었다. 지금부터는 시원한 물도 못 마신다. 진짜 금식이다. 빨간 양념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치킨을 보고 있자니 턱 밑 침샘이 폭발한 것처럼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어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다행히 시끌벅적한 음악 소리에 나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내일 검진 끝나고 꼭 치킨을 먹어야지!!   

  

힘겨웠던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물약을 마셨다. 몇 년 전 그 맛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속이 더부룩해졌다. 이제 물 2리터를 마실 시간이다. 찬물을 들이켰다. 사약을 먹는 것도 아닌데 물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화장실을 들락거리다 보니 날이 샜다. 다음 날 아침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편에게 괜찮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지난 난 밤 얼마나 힘들었는지 서로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둘이 동시에 우리 내년에는 대장내시경은 하지 말자며 웃었다. 그래도 웃을 힘이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초음파, 대장내시경, 위내시경, 피검사 등 갖가지 검사를 끝내고 나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초음파를 할 때 유난히 의사의 손놀림이 신경이 쓰였다. 검사했던 부분을 또 하고 또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어디가 안 좋냐고. 그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모든 검사를 마친 후 남편과 함께 국밥집으로 향했다. 점심때부터 치킨은 무리였다. 그리고 병원 안내장에도 검사 당일에는 죽이나 부드러운 음식을 먹으라고 적혀있었다. 순댓국은 괜찮다며 뽀얀 쌀밥을 순댓국에 말아 금방 담은 겉절이를 듬뿍 얹어 입속으로 넣었다. ‘아, 이게 행복이지’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일주일 동안 못 먹었던 빨간 김치가 이토록 달고 맛있다니. 순댓국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집으로 와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했다. 겨우 일주일 동안 음식 조절을 했을 뿐인데 먹고 싶은 대로,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2주 후 건강검진 결과를 받았다. 남편도 나도 일 년 전에 비해 검사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때보다 나이가 들었으니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동안 너무 건강 관리를 안 한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일상을 다시 돌이켜 보게 되었다. 강아지 산책 명목으로 매일 공원을 걷지만 하루에 만 보도 되지 않는다. 유산소 운동은 전혀 하지 않고 밀가루 음식을 즐겨 먹는다. 제 때에 음식을 먹지도 않으며 좋아하는 음식은 폭식한다. 모든 결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건강검진을 하기 전에는 몰랐던 나의 일상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고 문제를 찾았으니 이제 해결해야 한다. 일단 규칙적인 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근육 운동을 하고 하루 만 보씩은 무조건 걷기로 했다. 겨우 종이 한 장 받았을 뿐인데 나의 하루가 달라지고 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평상시에는 하지 못했다. 객관적인 결과를 손에 받아 든 지금이야말로 건강 관리에 더 힘써야 할 때라는 사실에 몸과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수많은 다짐을 하고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나는 여전히 밀가루 음식을 찾으며, 하루 만 보 걷기에 연달아 실패하고 있다. 한가지 달라진 것도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영양제를 챙겨 먹는다. 오늘만은 만 보 걷기에 성공하리라는 다짐을 해본다. 쭈니야 산책 가자!!



https://brunch.co.kr/@viviland/107

https://brunch.co.kr/@viviland/106

https://brunch.co.kr/@viviland/103


매거진의 이전글 비에 젖은 추억 한 꾸러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