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를 벗어나 외로움 속으로 이동했다
교문을 나와 내리막길을 걸어 시끌벅적한 시장통을 가로지른 뒤 좁은 골목길을 한참 걸어가면 짙은 초록색 대문집이 나온다. 대문을 열고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문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이모할머니 집 현관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방문인지 현관문인지 알 수 없는 아주 작은 문이었다. 그곳이 우리 집이었다.
당시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서는 대도시로 아이들을 보내 공부시키는 게 유행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유행에 동참했다.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대도시인 대구로 삼남매를 보냈다. 먼저 대구로 간 오빠와 언니는 외할머니 집에 지냈다. 외할머니가 갑자기 인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오빠와 언니는 이모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나도 이 무렵부터 대구에서 살기 시작했다. 이모할머니와 2층을 함께 썼지만 우리 집은 작은 방 한 칸이 전부였다. 부모님은 주말마다 와서 반찬이며 빨래를 해주셨지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삼 남매는 정서적 허기를 어디에서도 채울 수 없었다.
낯선 학교와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나는 반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냈고 학교가 끝나면 놀이터에서 놀거나 친구 집에 초대받아 놀기도 했다. 쉽게 친구를 사귀는 성격 덕분이었다. 당시 우리 반에서 가장 예쁜 아이가 있었다. 내 기억으로 그 아이는 뽀얀 피부에 늘 원피스를 입고 다녔고 리본이 큼지막한 머리띠를 자주 하고 다녔다. 딱 봐도 부티가 흐르는 아이였다. 하루는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 친구는 예뻤지만,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전학생인 내가 반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노는 모습이 친구는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학교가 끝난 뒤 친구와 걸어가는 데 우리 집 가는 길과 방향이 같았다. 내리막길을 걸어 익숙한 시장통을 가로질러 왼쪽으로 가면 우리 집, 오른쪽으로 가면 친구 집이 나왔다. 나는 우리 집도 이 근처라며 신기하다며 우리 앞으로 자주 같이 놀자는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친구 집 앞에 도착했다. 1층에 여러 상가가 있는 아주 큰 건물이었다. 상가 가장자리에 화려한 은색 대문이 보였다. 친구가 벨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높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또 다른 대문이 나왔다. 어떤 할머니가 대문을 열고 나왔고 친구를 안아주었다. 그러고는 이내 나에게 시선이 멈췄다. 누구냐고 묻는 할머니에게 친구는 같은 반 친구라고 나를 소개했다. 할머니는 “어서 와 우리 00 이가 처음으로 친구를 집으로 초대했네.” 하시며 나를 환영해 주셨다.
친구 집 거실은 엄청 넓었고 반짝이는 대리석 때문인지 이곳저곳에서 환한 빛이 나는 듯했다. 거실 한쪽에는 나무 그네도 있었다. 친구는 자기 방에 가서 놀자며 나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공주풍의 침대와 가지런히 정리된 책상 그리고 다양한 장난감과 인형이 넘쳐났다. 둘이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창 맞은편의 우리 집 문이 보였다. 얼른 고개를 돌려 친구와 다시 놀았다. 그날 이후 나는 친구 집에 자주 갔고, 갈 때마다 할머니는 환대해 주셨다. 친구 부모님은 맞벌이 때문에 바빴고 늘 할머니가 우리를 맞아주셨다. 친구 집에서 놀다 저녁이 되면 홀로 골목길을 걸어왔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주황색 가로등이 밝혀주었지만, 우리 집 앞 골목길은 왜 유독 암흑처럼 어두웠는지 나는 늘 숨도 쉬지 않고 집으로 내달렸다. 공포를 벗어나 외로움 속으로 이동했다.
평일에는 사람 냄새나지 않는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언니와 오빠는 학원에 갔고 집안을 가장 먼저 밝히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이 싫었다. 우리 집 창문을 통해 보이는 건너편 이층 집은 친구 집이었다. 친구 집은 밤이 되면 온 집안이 환하게 밝혀졌고 창문으로 친구와 친구 부모님의 움직임이 우리 집에서도 훤히 보였다. 저 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 집의 따스한 온기가 우리 집까지 전해지는 것 같아 지금 있는 이곳이 더 시리게 느껴졌다. 창가로 사람이 가까이 오면 혹여 친구가 우리 집을 알아볼까 봐 얼른 커튼을 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 셋이 사는 집안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주말마다 오시는 부모님의 잔소리와 시름은 늘어갔다. 과연 이게 맞는 걸까 부모님도 우리도 행복하지 않았다. 2년 만에 부모님은 결단을 내리셨다. 언니와 나는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갔고 오빠만 이모할머니 집으로 들어가서 살았다. 아마 아들에 대한 기대와 미련을 못 버리신 듯했다. 다니던 학교로 다시 전학을 온 덕분에 나는 쉽게 학교생활에 적응했다. 친구들도 그대로였고 선생님들도 익숙한 분들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살다 내 집으로 돌아오니 모든 게 정상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불 켜진 집이 익숙했고 저녁마다 엄마가 해주시는 맛있는 음식에 행복했다. 엄마의 잔소리와 아빠 몸에 밴 담배 냄새가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행복은 경험치였다. 불행을 겪어 보지 않으면 행복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듯 나는 이층 집에서는 불행을 경험했고 시골집에서는 행복했다. 더없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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