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 기자도 <알혼섬> 작품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이 기자?
청년들 사이에서 ‘내채공’의 또 다른 이름은 ‘내일 채움 노예계약’이었다. 대한민국에 건강한 중소기업은 잘 없었고, 2년 안에 청년과 함께 시너지를 내서 성장할 수 있는 중소기업은 더더욱 없었다.
내 두 번째 회사 대표는 매일같이 자신이 얼마나 척박한 환경에서 매체를 운영하고 있는지, 어떤 신념을 가졌는지, 그런데도 매달 직원들에게 임금을 밀리지 않고 주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뛰고 있는지를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적은 임금이지만, 직원인 우리도 함께 열심히 뛴다면 회사는 더욱 성장할 거라고 얘기했다. 나는 그렇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대표에게 항상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투자 없는 성장은 없다는 말이었다.
사실 두 번째 회사는 업무적으로 나와 굉장히 잘 맞는 곳이었다. 문화의 흐름을 가장 최전선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내겐 정말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입사 초기 꿈에 부풀었던 나는 대표에게 다양한 취재 아이템들을 제안했다. 동시에 좁은 시야에서 섣부르게 판단한 내용도 보고하기도 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떤 태도가 좋은 상사인지는 아직도 내게 의문점이다. 대표는 내 취재 아이템이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며 무시했고, 자신이 생각해 온 아이템을 내리꽂았다. 어차피 내가 열심히 고민해서 제안해 봤자 취재해야 할 아이템은 정해져 있었다. 섣부른 판단에는 비아냥과 질책만이 있었다. 미술부 기자가 그런 것도 모르냐며 질책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는 점점 기계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전시를 보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믿고 있던 회사 의자의 두 개의 다리가 삭아갔고, 내채공을 ‘내일 채움 노예계약’으로 버티기 시작했다.
나는 2021년에 코로나19로 국가의 재정이 좋지 않은 시기에 내채공을 가입했다. 입사 후 3개월 차에 가입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가입정원이 모두 채워진 상태여서 국가 예산이 추가로 집행되길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나는 내 정신건강을 보듬으며 6개월간 대기를 했고, 2년의 내채공 기간과 1개월의 서류 정리 기간을 버텨서 내 사회초년생의 결실을 완성할 수 있었다.
퇴사 직전까지도 많이 고민했다. 과연 퇴사하는 것이 맞을까, 3년도 꽉 채우지 못한 새파란 신입 직급에서 적지 않은 나이인 내가 또 한 번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 순간을 다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2년여간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작가들의 말 덕분이었다.
2년 7개월간 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미술 작가와 기관장, 유명 인사들을 만났다. 즐겁지 않은 기억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 시간 중에서 나를 버티게 했던 일화가 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 《회천回天》을 열었던 황재형 작가의 인터뷰였다. 회사에 입사한 지 3개월 정도밖에 안 된 새끼 기자가 한국 미술계 원로급 작가의 인터뷰를 나간다고 해서 긴장을 많이 했다. 물론 인터뷰어는 대표였고, 나는 속기사의 역할만 하면 됐다.
작가의 전시를 두 번이나 가서 봤고, 최대한 많은 자료와 작가의 강의 영상도 찾아봤다. 기자니까, 객관적인 정보를 토대로 깔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동시에 내 안에서는 작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알혼섬>이라는 작품이었다. 황재형 작가의 전시를 볼 때마다 나는 <알혼섬>이라는 작품에 발이 묶였다. 그 앞에서 서 있으면 엄청난 고독이 밀려왔다. 흑연으로 가득 칠한 바다와 섬을 보면서, 나는 몇 번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그냥 슬펐다. 그림이 가슴속을 한 번 긁고 내려가는 듯했는데, 그것은 상처라기보다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가 스쳐 가야 할 세월의 바람 같은 것이었다. 분명 나는 그림 앞에 서 있는데, 막연한 삶과 시간이 온몸을 에워싸는 듯했다. 왜 그런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감상을 구구절절하게 전달하기엔 부끄러웠고, 질문에는 아주 간략하게만 적었다. “<알혼섬>이라는 작품을 인상적으로 봤다.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싶다.”라고 질문지를 완성했다. 사실 이렇게 적은 이유엔 대표의 비아냥도 한몫했다. 대표는 전시를 보고 나면, 꼭 어떤 작품이 좋았는지 묻곤 했다. 그리고 자신이 인상 깊게 본 작품을 나도 똑같이 얘기하면, 굉장히 좋아하며 자신의 안목을 자랑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작품을 얘기하면 ‘그럴 수 있지’라고 동의는 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좋은지 설명해서 자신을 설득하길 바랐다. <알혼섬>에 대한 나의 감상을 전했을 때도 그랬다. 대표는 무엇이 좋은지 말하길 바랐지만, 회사 상사 앞에서 살아있는 모든 삶 앞에 놓이는 고독을 얘기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인터뷰에 나서기 전 대표는 <알혼섬>에 대한 질문을 탐탁지 않아 했다.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작품인데,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대표는 인터뷰에서 그 질문을 가볍게 넘기고자 했다. 그런데 미묘한 반전이 일어났다.
“<알혼섬>이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제가 또 몇 년 전에 러시아를 여행 다녀왔거든요.”
“아, 이 대표도 그 작품을 봤군요. 안 그래도 그게 꽤 이슈가 됐습니다.”
“이슈요?”
“아니, 나는 잘 모르는데, 미술관에서 알려줬어요. 어떤 젊은 래퍼인가 아티스트가 그 <알혼섬> 작품 앞에서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있는 사진을 SNS에 올렸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꽤 이슈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아, 그래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내 작품으로 그렇게 울었고, 내 작품에서 뭔갈 느꼈다는 게 감사하죠.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장르를 하든 좋은 작품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답을 듣는 순간에 나는 깜짝 놀랐다. 기자를 하고 있지만, 나도 언젠가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좋은 작품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손끝으로 저릿저릿하게 스며들어왔다. 하지만 그 감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작가님, 안 그래도, 저도 그 작품이 눈에 띄었습니다. 보고 나서 쉽게 잊히질 않더라고요.”
“아, 역시. 이 대표님도 문화 전문 매체의 수장이시니까, 느끼는 게 다르시군요. 정말 잘 되실 겁니다!”
그 대화를 듣는 순간, 나는 대표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때 대표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으면서 말했다.
“우리 이 기자도 <알혼섬> 작품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이 기자?”
그때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도 곧잘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 어떤 질문을 했을 때 작가가 이런 질문을 꼭 받아보고 싶었다고 얘기한다던가, 작품에 대한 해석을 전하면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맞다는 답이 돌아왔다. 인터뷰 중엔 대표는 내가 한 말 중에 괜찮은 말을 자기가 했다고 말했고, 그런 말을 했는지 까맣게 잊곤 했다. 한 명 있는 선배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내게 신경을 쓰지 말라고 말했다.
내 감상을 도용당하는 일이나, 내 견해를 빼앗기는 일은 왕왕 일어났다. 하지만 직장생활 중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는 자리에 있다 보면, 내가 한 말인지 다른 사람이 한 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버텼다.
그래도 도용당한 내 감상이나 나의 해석이 작가님과 통할 때 나는 속으로 굉장히 기뻐했다. 그 느낌이나 생각을 작가님들과 함께 공유하고 그림 앞에서 설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무엇을 볼 수 있는 눈이나 감각이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항상 나는 내 느낌이나 감각을 잘 설명하지 못했고, 어떨 때는 타인에게 쓸모없는 것이라는 비난받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작가들을 인터뷰할 때, 나는 내 다음 삶을 꿈꾸곤 했다. 언젠가 나도 저들처럼 내가 본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자리로 걸어 나갈 것이라고 꿈꿨다.
많은 나이, 좋지 않은 건강 상태,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애라는 꼬리표들이 아주 무겁게 내 발목을 옥죄고 낭떠러지로 끌고 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나는 작가님들과 아주 비밀스럽게 소통했던 순간들을 낙하산으로 메고 동아줄로 붙잡고 있었다. 나의 끝이 낭떠러지라고 해도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