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면담을 통해 본 마음들..
면담을 하다 보면, 일 이야기보다 먼저 마음이 보일 때가 있다.
겉으로는 업무 이야기처럼 시작된다.
성과가 잘 나오지 않는다거나, 예전보다 말이 줄었다거나,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팀 안에서 존재감이 약해졌고, 자신감이 없어 보이고, 예전만큼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도 따라온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은 단순히 일하는 태도의 문제가 아닐 때가 많다.
그 사람 안에는 오래된 장면이 남아 있다.
입사 초기에 들었던 말투, 무심하게 던져진 표현, 공개적으로 비교당했던 순간,
질문했다가 차갑게 돌아온 반응, 잘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한순간에 작아졌던 기억.
누군가에게는 지나가는 말이었을 것이다.
바쁘니까 그럴 수 있었고, 일하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장면이 쉽게 지나가지 않는다.
말은 끝났는데, 마음은 끝나지 않는다.
상황은 지나갔는데, 몸은 아직도 그때의 긴장을 기억한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사람은 조금씩 달라진다.
먼저 말하지 않게 된다.
의견이 있어도 한 번 더 삼킨다.
괜히 나섰다가 다시 다칠까 봐 주변의 표정부터 살핀다.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마음보다 먼저 방어가 앞선다.
그렇게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소극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 번 작아지는 경험을 지나며, 조금씩 자신을 접어간다.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무안해지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부정당하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관계 속에서 작아지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마음의 방어였을 것이다.
문제는 그 방어가 오래될 때 생긴다.
조심스러움은 위축으로 보이고,
신중함은 소극성으로 읽히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물러난 태도는 열의가 부족한 모습처럼 오해된다.
조직은 그 사람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주도성이 부족하다.”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
“조금 더 적극적이면 좋겠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 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한때 잘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여러 번 다친 끝에, 더 이상 마음을 다 내어놓지 않게 된 것일까.
나는 면담을 하며 후자에 가까운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게으른 사람이 아니었다.
책임감이 없어서 물러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잘해보고 싶었던 사람들이었다.
인정받고 싶었고, 팀에 도움이 되고 싶었고, 자기 몫을 해내고 싶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 깊이 다쳤다.
일에 마음을 걸었던 사람일수록, 그 일터에서 받은 말은 더 오래 남는다.
관계에 기대가 있었던 사람일수록, 차가운 반응은 더 깊이 박힌다.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는 말도, 잘해보고 싶었던 사람에게는 자기 존재를 의심하게 만드는 문장으로 남는다.
“내가 부족한 사람인가.”
“나는 나서면 안 되는 사람인가.”
“내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가.”
“나는 여기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상처가 무서운 이유는 아픔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상처가 시간이 지나 자기 해석으로 굳어진다는 데 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말투였을 뿐이다.
처음에는 어떤 상황에서 나온 거친 표현이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미숙한 반응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나에 대한 결론처럼 남는다.
나는 원래 소극적인 사람이다.
나는 원래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이다.
나는 원래 자유롭게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어딜 가도 결국 이렇게 작아지는 사람이다.
이렇게 상처는 경험에서 끝나지 않고, 정체성의 일부처럼 굳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결국 떠난다.
그 사람에게서, 그 팀에서, 그 조직에서 벗어나려 한다.
떠나는 선택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계속해서 사람을 작아지게 만드는 곳이라면 떠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리를 옮긴 뒤에도 마음은 완전히 가벼워지지 않을 때가 있다.
새로운 일을 시작했는데도 비슷한 말투 앞에서 다시 긴장한다.
다른 사람을 만났는데도 비슷한 표정 앞에서 다시 얼어붙는다.
새로운 조직에 들어갔는데도 질문하기 전에 먼저 분위기부터 살핀다.
몸은 떠났는데, 마음은 아직 그 장면에 남아 있는 것이다.
상처받았던 나는 아직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회복은 단순히 장소를 바꾸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더 깊은 회복은, 상처 이후에 굳어버린 자기 해석을 다시 풀어내는 데서 시작된다.
나는 정말 약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한동안 아팠던 사람이었을까.
나는 정말 소극적인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더 다치지 않으려고 나를 접어온 사람이었을까.
나는 정말 자발성이 부족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내 판단을 꺼내도 안전하다는 경험을 충분히 얻지 못했던 것일까.
이 질문이 바뀌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뀐다.
상처받지 않을 용기란 아무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는 상처받지 않겠다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처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때 나는 아팠다.
그 말은 내게 오래 남았다.
그 장면 이후로 나는 조금씩 나를 숨기기 시작했다.
나는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쳤기 때문에 움츠러든 것일 수 있다.
이렇게 자기 마음을 정확히 알아보는 것.
그것이 회복의 첫 걸음이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작아졌는지 알지 못하면, 작아진 자신을 본래의 모습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이유를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비로소 자신을 덜 미워하게 된다.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무능한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그저 한동안 긴장하며 살아왔구나.
나를 지키기 위해 너무 오래 나를 접어왔구나.
이 이해가 생기면, 사람은 조금씩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기 시작한다.
한 번에 당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예전 같으면 삼켰을 말을 아주 작게 꺼내본다.
예전 같으면 내 탓으로 돌렸을 상황에서 한 번쯤 멈춰 생각해본다.
예전 같으면 상대의 표정 하나에 무너졌을 마음을 조금 더 붙들어본다.
그 작은 변화들이 회복이다.
회복은 상처가 없던 시절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사는 것도 아니다.
회복은 상처가 있었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은 채, 그럼에도 다시 자기 삶을 선택하는 일이다.
니체는 인간을 한 번도 무너지지 않는 존재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무너짐과 균열을 지나며 자신을 다시 만들어가는 존재에 가깝다.
그 관점에서 보면, 상처 이후의 삶도 단순한 복귀가 아니다.
무너지기 이전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짐을 지나온 뒤의 나를 새롭게 세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상처받지 않을 용기는 상처를 피하는 기술이 아니다.
상처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힘이다.
나는 상처받았지만, 그 상처가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흔들렸지만, 그 흔들림이 나의 본질은 아니다.
나는 한동안 나를 잃었지만, 다시 나를 찾아올 수 있다.
이 믿음이 사람을 다시 살게 한다.
면담을 하다 보면, 나는 종종 이런 마음을 만난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다시 살아나고 싶은 마음.
더 이상 작아지고 싶지 않은 마음.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는 희미한 감각.
다시 자유롭게 말하고, 다시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다시 자기 방식으로 일하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남아 있다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오래 움츠러들 수 있다.
하지만 영원히 움츠러든 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처는 남을 수 있지만, 그 상처가 미래까지 결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지금 조금 작아져 있다 해도, 너무 오래 자신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은 원래 작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한동안 아팠던 것일 수 있다.
당신은 원래 소극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조심하며 살아왔던 것일 수 있다.
당신은 원래 자유롭게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일해도 괜찮다는 경험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아팠던 사람은 회복될 수 있다.
오래 조심했던 사람도 다시 편안해질 수 있다.
한동안 자기 목소리를 잃었던 사람도 다시 말할 수 있다.
상처 없는 삶은 없다.
하지만 상처가 삶의 결론이 될 필요도 없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처를 전혀 받지 않는 강함이 아니다.
상처를 지나서도 다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힘이다.
나는 그 힘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상처받지 않을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