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텍스트에 있다고 말하는 프랑스 출판사
물론 개인 취향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프랑스인의 생각은 다르다. 몇몇 지인에게 갈리마르의 책 디자인에 대해 물었을 때, 그들은 무한한 신뢰를 내비쳤다.
실제로 동일한 디자인의 수천권의 책이 꽂혀진 갈리마르사의 서점에 가면, 어느정도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게 된다. 비록 어떤 책을 먼저 집을지 고민하게 될지라도. 어찌보면 이 디자인은 훌륭한 작품만 세상에 내놓는다는 출판인의 자신감일뿐더러 ‘가장 중요한 것은 텍스트에 있다’는 그들의 철학과 신념이 반영된 것이리라. 독자는 책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만 보고 책을 구입한다. 그야말로 책벌레를 위한 컬렉션이다. 단순하고도 우아한 갈리마르 출판사의 컬렉션 3가지를 소개한다.
어느 서점에 가든 블랑슈 컬렉션의 크림색 표지는 단연 눈에 띈다. 크림색의 매트한 질감의 종이에 책 제목은 붉은색으로, NRF 로고와 갈리마르 출판사의 사명은 하단에 적혀있다. 책 바깥에는 검은색의 테두리와 두개의 붉은 선이 그려져 있는 게 표지의 전부이다. 타이포그래피를 최대한 활용한 구성과 심플한 라인으로 디자인 요소를 최소화한 것이다. 실로 간결하지만 아름답다.
블랑슈 컬렉션은 갈리마르(Gallimard)의 가장 대표적인 문학 및 비평 시리즈 중 하나이다. 1911년부터 발간되어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명맥을 이어왔다. 사실 이 컬렉션은 20세기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권위있는 출판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발간된 책만 해도 총 6,800권에 달하며, 이 중 3,800권은 오늘날도 판매 중이다. 프랑스 문학사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기성 작가뿐만 아니라 뛰어난 신인 작가 발굴에도 앞장서기 때문.
1,930명의 저자, 매출액 8억 6천 5백만 달러, 매년 출판되는 책 중 평균 9권은 블랑슈 컬렉션을 통해 세상에 처음 소개되는 신작이다.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뮈리엘 바르베리(Muriel Barbery)의 ‘고슴도치의 우아함(L'Élégance du hérisson, 2006)’이다. 1911년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을 시작으로 카뮈의 ‘이방인’, 프루스트의 ‘꽃을 파는 소녀의 그늘’, 로맹 가리의 ‘하늘의 뿌리’, 미셸 투르니에의 ‘마왕’ 등 수많은 명작을 담아냈다. 지금까지 33건의 콩쿠르상, 25건의 페미나상, 16건의 르노도상 수상 등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프랑스 애서가, 책 수집가의 종착역이라 불리는 플레이아드 총서. 맑은 날 맨눈으로도 7개의 별이 뚜렷하게 보이는 황소자리의 플레이아데스(Pleiades) 성단1)의 이름을 딴 것으로 문학·철학사적으로 업적이 뛰어난 작가의 작품 모음집이다.
1931년 자크 시프랭(Jacques Schiffrin)이 시작한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총 800여 권이 출간됐으며, 매년 11권씩 출판되고 있다. 작자 미상의 작품을 제외하고 총 224명의 작가 중 단 17명만 살아생전에 이 시리즈에 이름을 올렸으며, 대부분 고인이 된 후 문학적 업적을 평가받아 포함되게 된다. 1931년 9월 10일, 샤를 보들레르의 작품집이 처음으로 발간됐으며, 윌리엄 세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등 고전 명작은 물론, 밀란 쿤데라, 알베르 카뮈, 필립 로스와 같은 현대 작가도 포함되었다.
‘플레이아드 입성'은 특히 프랑스 작가들에게 찬사의 표시로 여겨지고 있으며, 살아있는 작가가 플레이아드에 포함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2)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작가 루이페르디낭 셀린(Louis-Ferdinand Céline)은 살아생전 300편의 편지를 출판사에 보내 자신의 책을 발간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그는 사후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올해는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조세프 케셀(Joseph Kessel) 등이 포함되었다.
부드러운 가죽 커버에 아름다운 금박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속지는 매우 얇고 가벼운 성경 종이이다. 보통 1,500페이지에 달한다. 겉표지의 가죽은 책의 분야와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 20세기 문학은 브라운 컬러, 19세기 에메랄드그린, 18세기 블루, 17세기 베네치아 레드, 16세기 코린트 브라운, 중세는 보라색, 고대는 녹색, 영적 텍스트는 회색 그리고 문집은 붉은색이다.
책의 제본은 숙련된 장인이 실과 바늘로 수작업한다. 따라서 책이 제작되기 전까지 인쇄된 종이가 30년 정도 보관될 때도 있다. 이전의 양장본과 다른 점은 부드러운 가죽 커버와 매우 얇고 가벼운 종이를 사용해 무게를 줄였고, 문고판 사이즈로 제작해 휴대가 간편하다는 점이다. 한 권당 60유로이며 보통 서점의 유리장에 진열되어 있으며, 구입한 후에만 책을 펴볼 수 있다.
플레이아드 총서의 전문성은 단지 디자인과 제본에만 그치지 않는다. 작가별 전문가가 작품 선정과 편집에 참여하며 오랜 기간 연구해 펴낸다. 상세한 각주와 해석은 물론 논평까지 포함한다. 프랑스어가 아닌 언어로 쓰인 작품의 경우 대부분 전문 번역가를 통해 다시 번역한다고 한다.
1)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서양에서는 세븐 시스터즈(7 Sisters, 일곱 자매)라고도 불린다. 일곱 명의 인디언 처녀가 곰의 추격을 피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2) 플레이아드 총서에 생전에 포함된 작가는 다음과 같다.
르네 샤르(1983), 폴 클라우델(1948), 앙드레 지드(1939년), 줄리앙 그라크(1989년), 줄리앙 그린(1998년), 외젠 이오네스코(1991), 필리프 자코떼(2014년), 안토니오 로보 안투네스(2018년), 밀란 쿤데라(2011년), 장 도르메송(2015년), 클로드 레비 스트라우스(2008년), 앙드레 말로(1947년), 로제 마르탱 뒤 갸르(1955), 앙리 드 몽테를랑(1972년), 나탈리 샤로트(1996년), 생 존 페르스(1972년),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198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2016년), 필립 로스(2017년)
수많은 종류의 문고본이 있지만 프랑스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문고본을 꼽는다면 단연 폴리오 컬렉션일 것이다. 이 컬렉션은 1972년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총 1,330명의 작가의 4,700권의 책을 출간했다. 이 시리즈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초기의 방대한 양의 작품수와 발행부수가 손꼽힌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을 시작으로 시리즈 시작 첫 해 동안 약 500종의 책이 출간되었는데 그 발행부수가 1,500만권에 달했다. 또한 1972년부터 1978년까지 1,500만권이 팔렸다고 한다.
사이즈는 가로 10.8cm, 세로 17.8 cm로 일반적인 문고판(가로 10.5cm, 세로 14.8cm) 보다는 살짝 크다. 갈리마르의 컬렉션답게 표지 디자인 또한 일정한 규칙이 있다. 흰 배경의 상단 좌측에는 작가의 이름과 책 제목이 쓰여져 있다. 이미지는 사진, 그림, 일러스트 등 다양한 요소를 활용한다. 1985년까지는 주로 그림과 일러스트를 활용해 표지를 구성했으나 2008년 이후 사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인에게 폴리오 컬렉션이 갖는 의미는 크다. 매년 발행되는 수많은 책 중 갈리마르의 까다로운 심사기준을 통과한 작품만 수록되기 때문이다. 보통 블랑슈 컬렉션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책을 폴리오 컬렉션으로 펴내는데, 많은 프랑스인들이 이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거나 주머니에 꽂고 다닌다. 작고 가볍고 평균 6-7유로 선으로 가격도 저렴한 이 문고본이 프랑스 문학의 대중화에 기여했음은 의심할 것 없는 사실이다.
이 외에도 시집(Poésies Collection), 저명 작가의 실험적인 작품(L’Imaginaire Collection) 등 갈리마르에는 주목할만한 컬력션이 많다.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결같은 뚝심으로 출판업계를 지켜온 갈리마르. 오늘따라 집에 있는 갈리마르의 책을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