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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브르사비 Jan 19. 2021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아, 프랑스의 새로운 가족상

대안 결혼제도 팍스를 도입한 지 22년이 흐른 지금

두 명의 남자가 파리 시청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에 사인한다. 그들이 서명한 서류는 팍스(PACS·Pacte civil de solidarité, 시민연대계약). 쉽게 풀이하면 커플을 위한 파트너 계약이다.





프랑스가 대안 결혼 제도인 팍스를 도입한 지 22년이 흘렀다. 1999년, 동성 커플의 법적인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만든 이 제도는 2013년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후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팍스는 세액 공제, 건강보험, 비자 등에서 결혼한 부부와 동일한 혜택을 받는다. 팍스를 한 커플이 아이를 낳을 경우 어떤 차별도 받지 않으며, 양육 수당이나 보육원 등에서도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결혼과 다른 점은 연금, 상속, 재산 분할 등 재산 소유에 대해 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팍스를 맺은 커플이 계약을 해지한다면 이혼 시 필수인 재산 분할 및 소송 등의 절차가 필요하지 않다. ‘계약의 해지’를 위한 서류 신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또한 팍스는 법적 기록이 남지 않을뿐더러 한쪽이 결혼하면 그 효력이 자동으로 사라진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팍스를 맺는 것은 동성 커플뿐이 아니다. 2001년 1만 6589건이었던 팍스 커플 수는 2018년 20만여 건으로 늘었으며, 이중 다수가 이성 커플이다. 해마다 역대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는 결혼 수는 25만 건에 불과하다. 이처럼 프랑스인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점점 흥미를 잃어간다.


여기 각각 다른 이유로 결혼과 팍스를 선택한 세 커플이 있다.



결혼을 선택한 폴린 & 타렉

둘은 3년의 연애 기간 동안 2년 넘게 동거를 한 후 결혼하기로 했다. 다른 프랑스인처럼 연애-동거-팍스-결혼의 수순을 밟을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이 중점을 두는 가치가 결혼 제도와 가깝다고 생각해 결혼을 선택한 것이다.


“저희가 결혼을 선택한 것은 종교 영향이 컸습니다. 둘 다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가정에서 자랐고 종교적, 전통적 방식의 결혼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팍스를 선택한 니콜라 & 제시

2살 아이가 있는 니콜라와 제시는 결혼만의 장점이 무엇인지 반문한다.

“팍스를 맺은 지 7년째이지만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저희 부부는 팍스만으로도 충분히 법적 권리를 보장받고 있고, 아이도 마찬가지거든요.”


프랑스인 대다수가 팍스와 결혼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저 결혼보다 간소한 절차일 뿐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정부 지원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결혼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부모님 세대야 법적 보호를 위해 결혼이 필수였겠지만 오늘날은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라고 봅니다. 결혼이 관계의 견고함이나 사랑의 깊이를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니콜라는 팍스로는 보장되지 않는 연금과 상속 등의 재산권 이슈를 정리하기 위해 은퇴 전 별도의 공증을 받을 생각이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팍스를 맺은 대부분 커플이 재산 관리를 따로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있는 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보통 양육비와 생활비 등의 공동 비용을 상의해서 분담한다. 또한 팍스를 맺은 커플 중 일부는 다른 사람에게 배우자를 소개할 때 ‘파트너’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경제적 이유로 팍스를 선택한 기윰 & 자크

“프랑스는 1인 가구와 팍스 혹은 결혼한 커플 간의 세금 차이가 엄청납니다. 당장 결혼할 생각이 없고 만나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손해라고 생각했어요.”


기윰과 자크는 동성 커플이 아닌 오랜 친구 사이다. 두 사람이 팍스를 하자는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세금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던 어느 저녁이었다. 프랑스의 결혼 평균 연령 변화만 봐도 이들의 불평을 이해할 수 있다. 1997년 30.3세였던 것이 2017년에는 35.8세로 껑충 뛰었다. 두 사람은 대학 졸업 후 최소 10년 이상 미혼이라는 이유로 세금을 더 내야 했던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팍스는 커플을 위한 제도가 맞다. 그러나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요즘, 경제적 이유로 팍스를 선택한 이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비혼과 동거, 딩크족 등 전통적인 가족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의 가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사회가 다변화된 만큼 삶의 모습도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특정한 틀과 제도로 사람을 구분 짓는 것은 쉽다. 그렇지만 그 틀이 그 사람을 설명해주진 않는다. 우리도 좀 더 유연한 형태의 가족, 혹은 사회 공동체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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